전체 글115 미지의 방문자 '그것’이 내가 자는 집에 처음 나타났을 때는 바람 불고 비가 몹시 쏟아지던 어느 해 겨울 늦은 밤, 동네에서 숲 방향으로 오 킬로미터쯤 떨어진 외딴곳에 있는 양계장 지키기 위해 내려가 자던 시기였다. 울창한 유칼립 나무들로부터 빙 둘러싸인 가축 단지 내에는 동마다 오천 마리의 산란용 닭들이 기거하는 4동의 계사가 나란히 서 있었고 비탈길 아래쪽으로 돼지우리와 부속 창고, 관리인 용으로 지어놓은 집도 농장 위아래로 두 채나 세워져 있었다. 내가 편한 잠자리를 두고 관리인 가족까지 지척에서 상주하고 있던 양계장 단지 집에 내려가 자는 표면적 이유는 귀가 어두워서 밖에서 굿을 한다 해도 모를 관리인 대신에 정체불명의 들짐승들로부터 죽임 당하는 닭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은 나 혼자만에 공간에서 무엇이든 .. 2023. 12. 2. 베니스의 여인과 민속촌 할머니 이탈리아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 나는 지저분한 비둘기 떼들과 법석대는 관광객들 틈에서 거리의 화가들이 진열해 놓은 그림들을 보고 있었다. 그때 남루한 치마에다 자색 머플러를 쓴 한 여인이 내 손을 덥석 잡고는 내가 뭐라고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연신 손바닥 안 밖과 내 얼굴을 대충 관찰한 다음 뭐라고 열심히 말하는 내용을 추측해 보니 내 팔자가 아주 좋지 않다는 뜻 같았다.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의 모습과 60대 중반의 노파의 모습이 골고루 섞여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기묘한 모습을 지닌 이 집시 여인이 떠드는 말 중에서 간간히 이해할 수 있는 몇몇 단어들을 꿰맞춰 본 결과는 가관이었다. “그대는 먹고사는 데는 별 문제없는 운명을 타고났는데 애석하게도 얼마 살지 못할 필자로 세. 언제 어디에서 어떻.. 2023. 12. 1. 환각으로 가는 계단 중세기 켈트 뮤직 분위기를 자아내는 플루트와 함께 맑음의 여운을 한 껏 살린 12줄 기타 연주에 맞추어 발라드풍으로 시작해서 소프트 록으로 연결되다가 성격이 아주 다른 하드 록으로 끝내는 노래가 이 노래가 바로 하드록 뮤직의 최고봉이라고 알려진 보컬 밴드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이다. 그런데 이 노래의 뜬금없는 가사내용을 두고 삶의 철학을 추상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별 뜻도 없는 약쟁이들의 횡설수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하는 이들도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말과 말 사이, 그리고 뜻과 뜻 사이가 보편적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세상 어떤 돈으로도 살 수 없지만 멀쩡한 사람 뿅 가게 하는 환각제는 돈 만 있다면 얼마든.. 2023. 11. 28. 그리움… 그 가혹한 형벌 모는 불행의 원인은 술,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와인이 문제였다. 나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던 그 순간부터 몸은 없어지고 혼만 남아있는 유령으로 변했다. 그리고 일단 죽었으면 밝고 상쾌한 천국, 혹은 어둡고 뜨거운 지옥으로 가있어야 할 내가 무슨 연유로 한 장소에 갇혀 옴싹 달싹도 할 수 없는 불쌍한 신세가 되었을까? 나를 지금의 요 모양 요 꼴로 만들게 한 것은 10년 전 연말 모임에서 마구 마셨던 붉은 와인이 직접적인 요인이지만 그런 음주 상태에서 운전대를 잡게 만든 것은 친구들의 자랑질이었다 회식 분위기의 시작은 좋았다. 오랜만에 보는 동창들도 반가웠고 식탁 위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도 백, 적 두 종류로 넉넉하게 준비된 와인의 품질도 기대 이상이었다. 부지런히 먹고 마시는 와중에도 우리들의 정담은 .. 2023. 11. 27. 이국 처녀에게 보낸 연가 누구나 한 번쯤은 청춘남녀 간에 사랑을 이어 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꼭 누구의 중매를 서지 않더라도 누구의 부탁으로 연애편지를 대필했거나 전달해 본 경험이 있다거나 어떤 사람이 당신을 좋아한다고 알려준 적이 있다면, 사랑의 가교 역할은 이미 한 것이나 다름없지요. 고요한 달밤, 사랑에 빠진 젊은이가 연모하는 여성에게 바치는 연가. 등불이 모두 꺼진 고요한 밤에 퍼져나가는 바이올린 기타 줄의 아름다운 선율은 냉정한 처녀의 마음을 열게 하는데 부족함은 없다고 봅니다. 세레나데(serenade)는 저녁에 연주되는 소야곡 또는 야상곡을 일컫는 용어지만 이탈리아와 스페인 그리고 그들의 한 줄기 일부 중남미 라틴족 총각들이 마음에 두고 있는 처녀에게 보내는 연가(써레나따, serenata)의 의미도 있다네요 직설.. 2023. 11. 25. 파란 눈 실종 소동 독일 알프스 작은 산간마을에서 살고 있는 한스 피셔가 평소 즐겨 타던 연(행글라이더)이 갑자기 불어닥친 돌풍을 만나 죽음 일보직전까지 갔던 시기는 그가 막 사십 세 생일을 맞이하던 해였다. 까마득하게 높은 공중에 떠 있던 인간이 순식간에 땅바닥으로 추락했는데도 겨우 한쪽 눈만 잃고 생명을 건진 것도 기적인데 일 년도 채 못되어 이전과 다름없는 건강한 몸으로 돌아왔다면 그 동네사람들이 이름 대신 부른다는 인간 불사조란 칭호도 그렇게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 평소 거칠고 위험한 스포츠를 좋아하던 한스 피셔 씨는 사고 이후 연 타기는 물론이고 매 격주 간격으로 진행돼 오던 암벽 타기마저 가족들의 맹렬한 만류로 못하게 되면서 실의의 빠져 살던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엉뚱하게도 실명한 한쪽 눈에 끼어.. 2023. 11. 25. 시간여행자의 고국 방문 해외 한인 신분으로 처음 모국 방문했던 때는 전년에 터졌던 외환위기가 거의 극복되어 가고 프랑스 월드컵 대회가 한창이던 1998년 유월 초였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데 서울 한강의 건너편 일대가 과수원과 채소밭 일색이었던 시절, 어린 나이에 부모남 따라 이민 나갔다가 무려 33년이나 지난 사십 중반의 나이가 되어 고국방문을 위해 서울을 찾았다면 세상 모든 영상물들이 모여있다는 유튜브에서 조차 쉽게 찾을 수 없을, 거의 타임머신으로 한순간에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시간여행 수준의 고국 나들이였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듯싶다. 엘에이 공항을 떠났던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던 시간은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였고 모든 입국 수속 절차를 마치고 예약된 호텔이 위치한 신사동으로 가는 택시에 올랐을 때는.. 2023. 11. 24. 겨울 매미 당대 할리우드 명배우 찰톤 헤스톤이 주연으로 나왔던 성경 스토리 영화가 장안에 화제가 되던 해 봄. 우리 가족이 살던 동네는 서울 사대문 밖 변두리 동네라서 포장된 도로가 거의 없는 지역이었다. 신호등 없는 네거리, 가파른 골목길 입구에 쑥돌로 쌓아 올린 높직한 축대가 특징이었던 우리 집은 동네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이정표나 다름없었다. 자전거 수리점은 저기 축대 높은 집에서 왼쪽에서 삼분 거리. 솜틀집은 축대 높은 집 옆 골목길 여섯 번째 오른편 집... 겨우내 얼어 있던 도로가 모두 녹은 봄날. 우리 집 맞은편 작은 공터에 리어카 좌판이 들어섰다. 얼마 되지 않은 좌판 위에는 그림딱지와 나무팽이. 엿과 사탕, 마른오징어, 참 빗과 파리채 같은 주부 용품들, 심지어 어른들을 위한 술과 담배도 놓여 있었다.. 2023. 11. 20. 이전 1 ··· 6 7 8 9 10 11 12 ··· 1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