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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베니스의 여인과 민속촌 할머니

by Seresta 2023. 12. 1.

 

이탈리아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 나는 지저분한 비둘기 떼들과 법석대는 관광객들 틈에서 거리의 화가들이  진열해 놓은 그림들을 보고 있었다. 그때 남루한 치마에다 자색 머플러를 쓴 한 여인이 내 손을 덥석 잡고는 내가 뭐라고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연신 손바닥 안 밖과 내 얼굴을 대충 관찰한 다음 뭐라고 열심히 말하는 내용을 추측해 보니 내 팔자가 아주 좋지 않다는 뜻 같았다.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의 모습과 60대 중반의 노파의 모습이 골고루 섞여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기묘한 모습을 지닌 이 집시 여인이 떠드는 말 중에서 간간히 이해할 수 있는 몇몇 단어들을 꿰맞춰 본 결과는 가관이었다.

 

“그대는 먹고사는 데는 별 문제없는 운명을 타고났는데  애석하게도 얼마 살지 못할 필자로 세.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 가혹한 운명을 지녔으니 이 얼마나 기막힌 고 ...ㅉㅉ. 

그래도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거든."

 


 
" @.@ ???"
 
"뭘 그렇게 보고 있니? 어서 내게 돈을 줘서 액막이를 해야지. 자! 빨리 돈 내.
 죽지 않으려면"
 
아주 적은 돈으로도 한 인간의 기구한 운명을 좋게 바꾸어 볼 수도 있는데 뭘 그렇게 꾸물대냐는 듯, 돈 달라고 늘어지는 여인 등쌀에 못 이기는 척 내민 동전 몇 닢을 받은 그녀는 돌바닥에다 패대기치고는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 자기는 사람의 앞 날을 알려 주고 나쁜 운명일 경우 액땜해 주는 고마운 사람이지 거지가 아니라는 뜻 같았다.

 

여인이 뭐라고 고함까지 질러 대자 무슨 일인가 싶어 모여든 많은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 않고 욕설을 퍼붓는 여인. 아니 누가 저보고 손금을 봐달라고 했나. 사람들의 시선도 따갑고 창피하여 자리를 피했더니 계속 끈질기게 소리치면서 쫓아왔다.
 
참는 것에도, 그리고 여인이라고 봐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내가 가던 길을 멈추며 집시 여인의 얼굴을 째려보자 그녀는 오히려 씩씩 웃어가며 무언의 제스처를 보낸다.
 
먼저 제 오른편 중지를 추켜세우더니 곧이어 허공을 향해 둥근 원을 그려 보였다. 다시 양 주먹을 좌우로 움직이는 모양새로 자동차 운전하는 장면을 연출하더니 이제 머플러는 언제 벗겨졌는지 산발로 변해 버린 제 머리를 축구선수 헤딩하듯 옆으로 들이받은 다음 마지막으로 오른손 칼로 제 목을 툭툭 치면서 기다란 혓바닥을 한번 쏙 내밀어 보였다.
 
손짓 몸짓이 좀 거창해서 그랬지 그녀가 보낸 메시지는 아주 간단했다. " 너는 앞으로 한 달(혹은 일 년?) 안에 차 사고로 되질 것이다. 날름!"
 
지금 회상하면 별것도 아닌 유치한 장난에 지나지 않았으련만 그때는 무엇이 그렇게도 화가 났을까?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던 나는 스스로 깜짝 놀랄 만큼 벽력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돌변한 내 모습에 혼비백산한 집시 여인. 죽기 살기로 도망치는 여인의 뒤쫓아가는 내 머릿속에는 오직 잡아서 요절 낼 생각뿐이었는데 만약에 어떤 음유시인이 그 자리에 있어 이 광경을 지켜봤다면 비파를 뜯으며 다음과 같은 시 하나쯤은 읊지 않았을까?
 
"햇살 받아 반짝이는 금빛 물결의 베네치아~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장 복판에서 
두 인간이 쫓기고 쫓는 희한한  광경을 연출하네.
무슨 사연으로 산발한 여인은 앞에서 죽어라 뛰고
어이하여  가는 눈 가진  사나이가 쫓아가는 고"

 

평화롭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베니스 광장 한 복판에서 일어났던 엽기적 사건은 집시 여인의 잽싼 발걸음과 군중들의 따가운 눈총에 주눅 들어 쫓기를 단념한 나의 결단으로 끝났으니 그만하기가 다행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그것도 강제로 봤던 나의 점치기의 결말은 아주 참혹했지만 집시의 점은 완전히 엉터리였다. 죽거나 다치기는 고사하고 이십몇 년이 지나간 이 날 이때까지 아주 멀쩡히 잘 살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 일 이후 나는 손금이나 관상 사주팔자 같은 운명 철학과는 담쌓으며 지내다가 IMF 사태로 난리 치던 8여 년 전 고국 나들이때 난생처음 점다운 점을 보게 되었다. 장소는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난 동갑내기 친구와 나들이 갔던 용인 민속촌. 도사님은 그 민속촌 내 점집에 상주하시는 어느 할머니.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는 미래를 알아본다는 그 자체가 겁도 나고 싫었기에 할머니 도사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안 보려고 했다.
 
예전에도 집시의 엉터리 점괘로 인해 한 동안 맘고생이 심했던 기억이 되살아난 탓도 있었지만 이미 인생 후반기로 들어선 나이라면 아무래도 찬란한 미래는 어렵겠고 고작 현상유지 아니면 질병 사고에서부터 조기사망이라는 끔찍한 점괘가 나올지도 모르는 점을 뭣 하러 본단 말인가.

 

나와 비슷한 심정에 있던 친구도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민속촌 온 김에 점 한번 보고 가는 것도 나쁠 것 없다는 생각과 더불어 도사님의 인자하신 모습에 용기를 얻은 나는 어릴 적에 예방주사 맞는 기분으로 나섰다. 그래. 어차피 언젠가는 병들고 죽을 몸인데 뭐..
 
"먼저 이만 원만 내놓으셔" 복채를 받아 쥐신 할머니는 먼저 내 얼굴을 찬찬히 관찰하고 나서 다시 손금까지 두루 살피셨다.
내 이름과 생년월일까지 시시콜콜 묻고 나서 이윽고 한가한 봄날에 시조 읊듯, 잠투정하는 아기에게 자장가 들려주듯 음률에 맞춰 점괘를 풀이한다.

 

"..... 그러니까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 사람이 마누라 잘 만난 덕으로 살아왔네~ 지금은 따~악 막힌 듯해도, 말년이 좋고 좋구나. 꾹 참고 오 년만 기다려보세. 얼쑤 좋다. 남~종 여종 거느리며~ 곡간에는 쌀 섬께나 쌓아놓고, 풍악 소리하며 구십까지 잘 살다 가실 팔자일세!"

 

 

잔뜩 긴장한 나머지 석고처럼 굳어버린 내 얼굴이 따스한 봄날에 얼음 녹듯 사르르 풀어지며 입가의 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는 광경을 유심히 바라보던 겁 많은 친구. 무럭무럭 일어나는 호기심을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돈 이만 원을 거네면서 마치 재판관 앞에 선 죄인이 되어 할머님 앞에 섰겠다.
 
"..... 어허~! 임자 팔자도 만만치 않구먼 그래.
 
그저 욕심만 가득하고 게다가 심술마저 있어 고작  남의 짐이나 지고 살 위인이 마누라 잘 만난 덕에 잘 만 살고 있구나". 지금은 비록 사방팔방 다 막힌 듯해도, 딱 오 년만 기다려 봐. 어이 좋구나 좋아. 남종, 여종 거느리고, 쌀 섬, 비단 필이나 재워~놓고, 구십 넘게 춤추며 살 팔잘세."
 
거의 대동소이한  점괘에 나와 친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어서 충격에서 깨어난 친구가 도사님께 항의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내가 무슨 욕심이 그렇게 많으며 또 그걸 어떻게 아냐고 따지고 드니 도사님 왈, " 임자 콧 때길 보니 욕심 없다 할 수 없소" 딱 부러지는 할머니 단언에 나도 모르게 친구의 코를 살펴보았더니 코 끝이 뭉툭하고 불그스름한 게 아닌 게 아니라 심통이 살짝 엿보였다.
 
그러니까 형편없이 살아야 마땅할 운명을 지고 태어난 우리 두 인간은 여편네 잘 만난 덕분으로 산다는 뜻인가?

졸지에 비참한 기분이 우리 두 사람은 파란 하늘에 가득 피어오른 흰구름을 바라보았다. 그때가 사오십 대 가장들이 때를 지어 거리로 나돌았던 환란 시절이었고 게다가 휴일도 아닌 평일 오전 열한 시경에 번번한 얼굴로 민속촌을 어슬렁 댔으니 도사님 눈에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을까?

 

묵묵히 한적한 민속촌 오솔길을 걸어가던 친구가 말문을 열었다.

" 아무리 생년월일이 비슷하다지만 어떻게 두 사람 다 똑같은 점 쾌가 나올 수가 있는 거지?"
 "똑같기는... 그대는 욕심에다 심술도 많다고 했네..."
 "자네까지 왜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신경질 나 죽겠는데...

눈부신 정오. 신록이 우거지는 고국의 유월은 유난히 화창 했고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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