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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여행지에서 무전취식

by Seresta 2024. 4. 26.

 

사업 때문이든 아니면 관광을 목적이든 여행은 언제나 즐겁기 마련이고 목적지가 타국인 경우라면 한층 더 즐거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친구들과 함께 떠난 외국 여행지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나 홀로 시내에 나갔다가 지갑을 잃고 비 오는 밤거리를 헤매는 좀 특이한  관광을 해야 했다.

네 명의 친구들이 목적지 공항에 막 도착하여 예약된 숙소에 들어가 여행가방을 풀었을 때 날은 어느새 저물고 차가운 보슬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장거리 비행에 피로감을 느낀 친구들은 숙소 내에서 저녁식사와 휴식을  원하는 바람에 밤거리 구경을 제시했던 나 혼자만이 짐 풀기가  무섭게 샤워도 저녁식사도 마다하고 시내로 나갔으니 스스로 사고 칠 기회를 만든 셈이다..

평소 습관대로 바지 뒷 주머니에 잘 넣어두었던 지갑은 택시비 지불 할 때도, 어느 빵집에서 생수 한 병 값 치를 때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다 어느 편의점에서 우산 값 지불하려다가 지갑 없어진 것을 알았으니 거리 상점들의 진열대를 구경하던 와중에 흘리지 않았으면 어느 솜씨 좋은 소매치기에게 당한 것이 분명했다.

덤벙끼가 다분한 나에게 소지품 분실은 그렇게 놀라운 일은 못되었지만 지갑을 잃은 적은 없었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여권과 항공 티켓, 그리고 여행비 일체를 호텔 금고 안에 놓고 적은 액수의 돈만 지갑에 넣고 나왔다는 것. 

’ 그래 미리 조심하길 잘했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 ‘


지금 당장 되돌아갈 차비조차 없는 기막힌 상황 가운데 그 정도 손실만 본 것도 다행이었다고 으흐흐 회심의 웃음까지 날렸으니 세상에 나 같은 바보가 어느 곳에 또 있으랴. 하지만  나의 근거 없는 여유로움은 상점문들이 하나둘씩 닫히기 시작하고 비에 젖은 옷과 구두, 그리고 밀려드는 허기로 인하여 금세 끝장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돈은 없지만 호텔로 가서 지불할 요량으로 택시 잡기에 나섰지만 스쳐가는 그 많은 택시 중에 빈 자동차는 한대도 보이지 않았다.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는데 짙은 안개마저 깔리기 시작하면서 길가에 서있는 것조차 위험해져  택시 잡을 만한 장소가 나타날 때까지 무작정 걷기로 했다.

 

 

 

지금 쯤 안락한 호텔식당에서  맛있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향기로운 커피와 와인잔을 들고 있을 여행 동료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 칠칠치 못한 놈은 이렇게 고생하는 거야. 실컷 고생해 봐야 정신 차리지.  스스로에게 책망하면서 비에 젖는 줄도 모르는 체 마냥 걷다가 보니 우윳빛 조명 아래 펼쳐지는 거리의 모습은 천천히 걷지 않으면 도저히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을 황홀한 아름다움이었다..

지붕 처마도 예술, 덧문이 닫혀있는 창문틀도 예술, 창문 틈새에서  새어 난 희미한 불빛들. 나는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비와 안개가 빚어내는 절묘한 풍경에 흠뻑 빠져서 비에 젖어 추운 줄도, 배고픈 줄도 모르고 마냥 걷고 또 걷다 보니 밝은 불빛 아래 간판들이 즐비한 길로 들어섰다.

 


간판마다 특색 있는 카페들 중에서 가장 만만해 보이는 집으로 들어서며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실내는 매우 검소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지만 피아노와 가수까지 있는 생음악 카페였고 바텐터가 동양 사람이라 조금 마음이 놓였다.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젖은 머리를 대충 씻어내고 메뉴에서 가장 푸짐해 보이는 와인 한 병과 소시지, 치즈 그리고 감자튀김 콤보 주문해서 느긋이 마시고 먹고 있노라니 바텐터가 서투른 영어로 말을 건네 온다.

 

-본인은 나라가 망할 때 보트 타고 탈출했던 베트남사람인데 당신은 한국 사람?
- 어! 내가 한국인인 줄 어떻게 알았나
-어쩐지 느낌이 들어서. 근데 무슨 이유로 잔뜩 젖었음?

-지갑 잃어버려서 택시도 못 타고 걸어오다가 그만.
-이런~ 지갑 잃었다면 돈도 없을 텐데 어떻게  이런 비싼 와인을?
-뭐 이 정도 액수를 갖고...
-$$$ 가 별 것 아니라고? 당신 이제 큰일 났네!
-으악! 아니, 여기 메뉴에도 분명 얼마라고 나와 있는데?
-그건 한 잔 시킬 때. 한 병의 가격은 $$$!!

-내가 차고 있던 이 시계 결혼 예물로 받은 아주 비싼 놈이니 맡기고 갔다가 내일 와서 지불할게.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택시비 변통도 부탁..


-이런 변이 있나? 이곳서 십 년도 넘게 일해왔지만 당신과 같은 손님은 처음이네. 그냥 말로 해선 안 되겠네. 여기 매니저님!

체격은 크지 않은데 눈썹이 아주 이상하게 생긴 지배인이 왔다.

-여기는 술집이지 전당포가 아님. 돈 없으면 그냥 가지 왜 들어왔나?
-춥고 배고파서 들어왔지 괜히 들어 들어왔겠나. 지갑 도둑맞아서 이리되었으니 택시비나 빌려줘
-말이 안 통하니 경찰을 불러야겠군.
-불러봐야 나 지금 아무것도 없어 너네 동족이 훔쳐갔거든.

나는 본래 뻔뻔한 성격도 아니고 더군다나 무전취식할 만큼의 배포도 없는 사람인데 그날 밤은 어찌 된 노릇인지 한 없이 염치없었고 끝도 없이 뻔뻔스러울 수 있던 이유는 저들 동족에게 도둑맞은 데서 오는 보상심리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같은 동양인의 체면 때문이었는지 월남인 바텐터가 보증을 서줘서 그 카페 창업 이래 첫 번째 외상 손님이라는 기록을 올리며 덤으로 택시비까지 빌릴 수 있었다.

지갑 잃어버린 것이 행운이었을까?
다음날 저녁, 우리 일행은 예정에 없던 그 카페를 찾아 멋진 여가수의 감미로운 샹송을 들으며 밤늦도록 향기로운 적포도주 백포도주 무지갯빛 칵텔을 음미하고 또 음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