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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양계장 등불

by Seresta 2024. 3. 22.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이 두 개의 시는 극심한 진통을 겪으며 낳으시고 기르시고 훈육하시는 와중에서도 끝이 없는 집안 살림마저 감당해야만 하셨던 우리들의 어머님을 기리기 위해 탄생된 시의 첫 소절 들로서 이미 오래전부터 온 국민의 애창곡으로 승격된 [어머니 은혜]와  [어머님 마음]의 노랫말이 되었다.

그런데 유독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에 관한 노래들은 보이지 않고 아버지 은혜라든지 아버님 마음을 찬미하는 시가 어머니에 비해 많이 인색한 이유는 아마도 양친의 위치를 동등하게 보는 서구인들과는 달리 본인의 감정 노출은 물론이고  자녀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 표출이나 사랑한다는 다정한 말 한마디조차 쉽게 못 건네는 한국인 특유의 가부장 문화 때문 일 것이다. 

삶에 자잘한 속박이 많았던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하고 든든한 남성. 집안의 기둥 이미지를  고수하시느라 힘들고 속상하고 슬픈 일들이 몰려와도 애써 눈물을 참으시며 마치 아무것도 아닌 듯 태연한  척하시던 우리들의 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사랑보다는 무서움이 많았던 자녀들이 알아주든 말든 묵묵히 험한 세상에서 다리가 되어주시고 언덕이 되어주신 대한의 아버지들은 어쩌면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고 노래하는 어머니 사랑을 능가할지도 모른다. 

나의 아버지는 남미 어느 나라의 시골, 전기마저 들어오지 않던 오지에서 오랫동안 양계를 하셨다. 


산란을 목적으로 하는 닭을 치는데 커다란 지장을 초래하는 밤이 긴 겨울이 올 때마다 깜깜한 새벽 다섯 시경부터 불을 밝혀줘야 했는데 전기 시설이 없던 때라서 발전기와 연결된 디젤 발전기를 작동시켜야만 했다.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동트기 전에 겨울날 새벽. 잠에서 깨어나기가 무섭게 밤새 덥혀진 따듯한 이불에서 나온다는 것 자체부터가 보통 일이 아닌데 허리가 휘어지는 겨울날의 디젤 발동기 시동 작업은 상당히 힘겹고도 괴로운 일이었다. 

아무리 뜨겁게 끓인 물로 디젤엔진을 덥혀봐도 밤사이에 얼어붙은 디젤엔진 시동 작업은 그토록 어려웠던 것.

 


핸들을 바퀴에 걸고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휘익~ 휘익~ 휘익........ 그리고 휘웅~~ 덜컥! 첫 번째 시동 실패!


숨 한 번 크게 몰아 쉬고 다시 한번 시도.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휘익~ 휘익~ 휘익........ 그리고 휘웅~~ 덜컥! 

두 번째 시동도 실패!

이렇게 서너 번 정도 생고생을 하고 나면 그만 땅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을 만큼 기진맥진해지기 마련. 몇 번의 재시도 끝에 가까스로 성공할 때쯤이면 그렇게 추운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온몸은 땀투성이었다

 

이렇듯 나의 아버님께서 꼭두새벽부터 중노동에 시달리고 계셨을 때 체력 좋던 나는 무엇하고 있었을까?

따뜻한 이불속에서 막바지 잠자다 말고 일어나서 벌벌 떨며 옷 껴 입고 나가 숨이 턱에 닿도록 발동기 시동 거는 작업…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추운 새벽에 이불 안에서 나가는  자체를  극히 싫어했던 나. 

 



잠결에 들려오는 시동소리를 들을 때마다 생고생하시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벌떡 일어나기는 고사하고 행여라도 도움을 요청받을까 무서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던 나는 옛날이야기 속 불효 막심한 인간들 중에 당당히 끼어있었다.

오랜 고생 끝에 마침내 작동이 되는 발동기.  퉁퉁퉁..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내가 잠든 방안에 까지  스며들던 매캐한 디젤 연기. 구구구~ 푸다닥'  전구 불들이 밝혀지기가 무섭게 날 밝아오는 줄 아는 수많은 닭들의 활개 치는 소리는 하루의 시작을 알려주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아버님은  오늘 시동이 늦게 걸려 몹시 고생하셨다. 네가 일어나 도와드리면 안 되겠니?"  못난이 아들에게 보내시는 책망 어린 어머님의 부탁은 차라리  체념 깃든 하소연이셨다.

요즘은 어디를 가도  전기시설 없는 곳은 극히 드문 세월이 되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봐도 어두운 밤, 불 밝히기 위해 발동기 돌리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난방시설이 잘 돼있는 만큼  춥다고 이부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어하는 부류도 소멸되었다.

 

게으르고 잠 많던 아들을 위해 그 힘든 짐을 수년 동안이나 홀로 지셨던 나의 아버님.  그런데도 나는  뭐가 그렇게도 힘든 일이었다고 이불속에 누워있었을까? 수년 동안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몇 번 밖에 도와드리지 못했던 나는 지금도 그 시절 내 모습을 회고할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 저려올 만큼  부끄럽고 후회가 된다.

수 백 년간에 세상 변화를 단 수 십 년, 한꺼번에 몰아 겪으셔야 했던 우리 부모님.
격동 시대에 태어나  나라를 빼앗기는 설움 속에서도 성장하시고 해방의 기쁨 도 잠깐. 

사악한 공산당 무리들의 압박과 수탈에 시달리시다 곧이어 터져 나온  참혹한 전쟁을 피해 부모님과 형제자매와 혈육을 두고 남으로 피난 가셨던 우리 아버지.

 

두고 온  북녘의 산하와 혈육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통받으시는 그 힘겨운 상황에서도  묵묵히 내리사랑을  실천하신 아버님의 사랑은  어머님 것 못지않은 참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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