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삼 학년 여름방학을 시작되던 어느 해 여름, 우리 집 건넌방으로 은숙이네가 세 들어왔다.
예쁜 아기 은숙이 아빠는 스포츠형 머리를 한 삼십 대 초반의 아저씨. 은숙이 엄마는 첫인상부터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이십 대 후반의 아줌마로서 남쪽 지방에 살다가 서울로 갓 이사 온 장소가 바로 우리 집 건넛방이었던 것.
두 돌 갓 지난 은숙 아기는 말도 곧 잘하고 몇 가지 동요도 부를 줄 알아서 여동생 없는 나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그 아이 엄마는 시장에 장 보러 가실 때도 나를 꼭 데리고, 빵이나 도나스를 만드시면 내 몫까지 챙겨주시며 가끔씩 자신의 무릎에 나를 뉘어놓고 귀지 파주셨을 정도로 볼 통통하던 나를 귀여워해 주셨으니 그래서 내리사랑이란 말이 생겨난 모양이다.
이십 대 후반에서 많아야 삼십 초반 정도였을 은숙이 엄마는 지금 생각해도 아주 대단한 미인이셨다. 빼어난 몸매에 매혹적 용모로서 당대 국내 최고의 글래머 여우로 대접받던 어느 여배우보다 오히려 나을 정도였는데 이는 그 당시 그분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우리 가족들의 공통적 견해이기도 하다.
아기 은숙이를 귀여워해 주고 은숙이 엄마의 총애를 마음껏 받고 지내던 어느 날 저녁. 그때쯤이면 집에서 저녁을 먹고 계셔야 야 할 은숙이 아빠가 동네 어귀에 서있는 전봇대에 기대어 서서 동네 친구 누나와 속닥이는 광경을 볼 때만 해도 저 아저씨 빨리 집에 가지 않고 뭐 하고 있나 했다.
내가 아줌마에게 달려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아저씨가 밖에서 어느 누나랑 얘기하고 있어요. 제가 봤어요"라며 일러바칠 때만해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그날 저녁 호젓하던 아줌마 방에서 대판 쌈 하는 소리와 함께 자지러지는 듯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와 나는 방문을 두드렸다.
-싸우지 마세요 아기가 자꾸 울잖아요!
-네가 그랬냐?
-뭐를 요?
-내가 어떤 여자랑 같이 있는 걸 봤다고 이 사람에게 말했다며?
-네. 왕대포집 전봇대 앞에서 아저씨랑 어떤 누나랑 얘기하셨잖아요.
-야 이 나쁜 놈. 어디 놀 데가 없어 동네 한복판에서 노닥였냐. 그래 너 죽고 나 죽자.
-아니 이놈의 여편네가 돌았나? 그래. 내가 뭘 좀 물어볼 것이 있어 그랬다. 그런데도 요 어린놈 말 만 듣고 날 닦달하네. 네 이놈!
"네...."
"날 봤다고 그랬지?"
"네!"
"내가 그 여자를 안고 있었거나 뽀뽀하고 있었냐?"
"아뇨.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만 하셨어요 “
그러자 하도 운 나머지 눈까지 퉁퉁 부어오른 아줌마가 내게 달려 들 듯 물으셨다.
"그 여자가 누군지 너는 아니?"
“네. 우리 반 동무의 누난데 되게 못 생겼데요."
갑자기 기세 등등 하던 아줌마의 눈매가 확 꺾이며 살벌하던 방 안의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네 이놈!
”네 “
-네가 아무리 어린놈이라 해도 그렇게 입이 싸면 되겠냐?
-당신도 그래. 어떻게 철없는 아새끼 말만 듣고 사람을 그렇게 의심할 수 있어? 나 오늘 날 벼락 맞았네."
모함을 받았지만 그 정도로 끝내 주신 아저씨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선한 가장, 철부지 말만 믿고 착한 남편을 닦달했던 아줌마는 천하에 악처이자 맹꽁이, 그리고 나는 까불고 입 싸고 철딱서니 하나 없는 덜떨어진 꼬맹이로 결론 나는 처연한 순간이었으나 어찌 연기 피어오른 굴뚝이 무사할 수 있으리오.
은숙 아빠와 내 동무 누나와의 수상쩍은 관계가 내가 처음 목격 한 지 반년 만에 사실로 드러났으니 세상에 철없는 꼬맹이의 말이라고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린 딸을 업고 친정으로 가셨다가 겨우 일주일 만에 돌아오신 은숙이 어머님. 남편이 피운 바람은 그저 한번 스쳐 지나간 하늬바람이라고 여긴 탓일까?
-아저씨는 어째서 아줌마처럼 예쁜 색시가 있는데 못 생긴 여자랑 연애했데요?
-글쎄다. 나도 애아빠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 아기 은숙이는 어느덧 중년의 세 자녀들의 엄마가 되었고 남편 바람기에 눈물짓던 은숙엄마는 딸 아들 다 시집 장가보낸 행복한 할머니가 되셨다. 기력이 모두 소진되어 부인 눈치만 보고 사는 못났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오붓한 은퇴의 삶을 즐기시는 은숙 어머님. 그때 남편과 헤어지셨더라면 과연 어떠한 삶을 사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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