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절 늦여름날 오후.
한 사내아이가 앞으로 길게 늘어난 자신의 그림자를 밟으며 한적한 황톳길을 걸어갑니다.
어쩌다 나타나는 자동차가 흙먼지를 날리고 갈 때도 있긴 하지만 워낙에 오가는 행인들이 드물다 보니 천천히 지나가는 주변 경치에 동화된 아이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합니다.
수업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철 따라 바뀌어가는 길가에 풀꽃 구경도 그렇지만 언제 날개가 다쳐 길바닥에 엎어진 참새나 길 잃고 헤매는 어린 다람쥐를 생포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죠.
이렇듯 볼 것 다 보고 걸어가노라면 많이 늦어져야 하는데 막상 학교에서 집까지는 한 시간 거리는 별 차이가 없어 그저 꾸준히, 그리고 부지런히 걷다 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다리의 통증과 이마에 돋아나는 땀방울들. 그것들이 뺨에서 목덜미로 흘러내릴 무렵 꽤나 큼직한 바위 하나가 아득한 태고 때부터 지금의 변화를 예측이라도 한 듯 보행에 지친 아이를 기다리고 있네요.
바위에 걸터앉아 하늘에 떠가는 구름도 바라보고 저만치 언덕길 옆 떡집 마당에서 주인 내외가 떡 찧는 광경을 볼 적마다 언젠가 인사 잘해 예쁘다며 찰떡 두 개를 주셨던 떡집 아주머니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맘때 떡을 만들어야 이튿날 새벽에 배달할 수 있단다 “
”안녕하세요! “
”그래. 오늘도 공부 잘했니. “
떡 선물 받은 다음 날부터 소년의 인사말 소리는 부쩍 커졌지만 떡집의 누렁개와 복실개는 정말 바보 같은 개들. 꽤 오래전부터 거의 매일 지나치는 아이에게 그만큼 얼굴을 익혔으면 잠잠해질 때도 됐으련만 매번 마주칠 때마다 마치 처음 보 듯 왕왕 짖어 대니 세상에 이런 똥개들이 어디에 또 있을까요?
허기진 배를 안고 묵묵히 걷던 아이.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고 느닷없이 한 다리를 힘껏 차 올리자 아이의 발에서 벗어난 오른편 고무신 한 짝이 허공으로 치솟다가 땅으로 떨어집니다.
아이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고무신점. 바르게 떨어져 지면 길, 뒤집히면 흉으로서 바르게 떨어질 확률이 칠십 프로가 되는 고무신 점의 결과는 제대로 떨어져 있었으니 소년의 작은 소망은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동네길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집까지 단숨에 달려간 아이. 뒷마당 빨랫줄부터 확인해 보는데 오늘은 빨강 몸에 은빛 날개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담벼락 옆 장대 끝에 앉아 있어 아이의 가슴을 마구 뛰게 합니다
장독대를 딛고 시멘트 블록 담 위로 올라 엎드린 아이는 잠자리 방향으로 조심조심 기어가서 팔을 잔뜩 늘여 간신히 닿을만한 거리까지 접근하여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이용하여 갑자기 날개를 확 집으면 잠자리는 몸을 활처럼 뒤틀며 격렬하게 저항하는데 이번엔 아쉽게도 날개 대신에 허공을 집고 말았네요.
잠자리를 놓쳐 허탈해진 아이. 상실감을 달래며 부엌으로 가서 가마솥뚜껑을 열어봤는데 어라? 아무것도 없네요. 가마솥 안에는 매일은 아니지만 찐 고구마가 담겨있는 날들이 많아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재일 먼저 열어 보는데 가만! 자세히 살펴보니 솥바닥에는 고구마 쪘던 흔적이 역력하고 냄새마저 은은히 배어있군요
저녁 식사 준비하시느라 아들 돌아볼 겨를도 없는 엄마에게 숨 가쁘게 묻는 아이. 그리고 막내아들을 위해 남겨놓았던 밤고구마 두 개를 오늘따라 친구를 데리고 일찍 집에 온 중학생 형아가 자기 친구와 같이 먹어치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 정말 큰일 났습니다.
학교 앞에 진 치고 있던 그 많은 먹거리들 몹시 먹고 싶었지만 동전이 한 닢도 없어 지나쳐야 했던 아이. 배고픔을 참으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분명히 남아있었다던 고구마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면 이보다 더욱 기막힌 일이 어디 또 있을까요?
낙심한 아이의 두 눈에 눈물이 솟아납니다. 고무신 점괘는 좋게 나왔는데 어째서 잠자리를 놓쳤으며 고구마까지 사라졌는지 아이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 아픕니다.
아이가 내는 울음소리에 방에서 나온 까까머리 형아 친구가 무언가 주머니에서 꺼내 울고 있는 꼬마손에 쥐어주었고. 눈물이 가득 담긴 아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학교 앞 문방구 점포에서 본 적이 있지만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커다란 왕사탕 한 개.
울음 뚝 그치고 제 팔로 눈물 한번 쓱 닦은 다음 사탕을 집어 입안에 넣고 보니 사탕이 너무 커서 입 안 가득 찼네요. 단맛이 가득 퍼진 입안에 왼편 오른편으로 사탕 굴림에 따라 아이의 양볼 도 번갈아 볼록입니다.
눈물 진 몰골로 사탕 먹기에 열중하는 모습이 귀엽고 웃겨서 낄낄 대는 형들 보기가 겸연쩍어 슬그머니 마당으로 나가려니 어느새 석양빛으로 붉게 변한 해바라기 이파리 끝에는 고추잠자리 세 마리가 날개들을 활짤 펼치고 졸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