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억은 아름다워

팔다 남은 아이스케키

by Seresta 2023. 12. 6.

 

 

하루 세끼 먹는 것 마저 수월치 않던 시절이 있었다. 가정마다 가난과 슬픔이 만연하던 그 시절에는 자녀들의 간식까지 신경 써줄 만큼 여유가 없었고 아이들 역시 자신의 처지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사과 배 같은 과일이나 과자 사탕이 먹고 싶어도 사 달라는 말도 못 하며 스스로 포기하였듯이...
 
세월이 어렵다 보니 공부에 열중하기보다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아동들도 있었는데 간혹 동네 건달들 비호 아래 구두 닦기나 짐수레 끄는 아저씨를 돕는 일 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가장 많이 하던 일은 소액의 보증금만 있으면 가능했던 이동식 아이스케이크 판매 일이었다.
 
대부분의 어린 아이스케키 장수들은 아이스케이크 가 담긴 통을 어깨에 메고 수업이 없는 주말과 방학 때마다 팔러 다녔는데 부모 대신 실질적 가장 노릇하던 아이들 중에는 학업마저 포기하고 판매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경우도 있어 세상물정 모르는 급우들의 부러움도 받았다.
 
보통 아이들이 쉽게 먹지 못하는 아스케끼를 실컷 먹을 수 있다는 점, 숙제와 같은 수업 과제물 등 학교에서 받는 고통과 압박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점, 동전 한 닢 얻기 위해 제 부모들을 졸라야 했던 일반 아이들과는 수준이 다른 고액수의 지폐를 항상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적은 액수의 돈이 소년가장 식구들에게 있어 얼마나 절실하고 소중한지 알 턱이 없는 철부지 아이들은 케키 장수 뒤에 졸졸 따라다니며 얼음과자 통을 대신 매주기도 했고 소리 높여 호객행위도 해줬는데 재미로 했다기보다는 모종의 대가를 바라고 한 행위였고 그러한 아이들의 바람은 언제나 해가 질 무렵까지 팔지 못해 절반쯤 녹아버린 아이스케끼를 얻어먹는 현실로 이루어졌다.
 
나도 단 한 번만이라도 좋아하는 아스케끼를 배 터지도록 먹고 싶은 나머지 그 애들 틈에 끼고 싶었지만 케키 통 대신 매주는 것도, 큰소리로 호객행위할 용기도 없어서 구경만 하고 지내다가 무척 무더웠던 어느 해 여름방학, 나와 내 동네 친구와 더불어 아이스케키 파는 급우의 일일 조수로 채용되는 행운을 잡게 되었다 나는 통을 메는 짐 꾼 동무는 아스케끼 소리치는 나팔수로.
 
동갑내기 사장님은 평소보다 팔십 개 더 많이 담긴, 이백 개나 들어간 케키 통을 내 어깨에다 걸어주었고 나는 생각보다 상당히 무거운 케키 통 무게에 문득 절망감을 느꼈지만 시작도 못한 체 포기할 수는 없는 것.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시도는 해야 했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케키 장사는 점심때까지 겨우 열댓 개만 팔렸을 정도로 판매실적이 저조하여 우리는 감히 얻어먹을 생각도 못하며 구슬땀을 흘려가며 케키 통을  졌고 목이 쉬도록 외쳤다. “아이스케끼 사세요~ 차갑고 달콤한 팥 아이스케끼~
 
주말의 동네는 가는 곳마다 한산해서 잣치기 딱지치기하는 아이들도, 유리알 놀이 물총 놀이하는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동네장사에 실망한 우리의 보스는 적지 않은 버스요금을 투자하여 한강까지 가는 강경책을 쓰기로 결정했다. 만약에 다 팔지 못한다면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다는 배수진을 치면서.
 
파아란 색과 회색 구름으로 엉클어진 하늘 경계선은 검푸른 색깔의 한강물. 나릇 배는 우리들의 희망을 싣고 물비린내 물씬 풍겨 나는 한강을 건네주었다.

 

한강 건너편 강변에는 벌써 꽤 많은 인파들로 북적대었다. 대부분 가족 단위로 놀러 나왔지만 노천식당 매운탕 추렴 나온 어른들을 비롯하여 까까머리 단발머리 소년 소녀들의 정다운 모습들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피서객들 틈에 합류하여 손님들이 안 사겠다고 고개를 내저어도 쉽게 물러서지 않는 찰거머리 상술로 재고량의 절반 가량 줄이는 데 성공했지만 한차레 소나기가 지나가고 서늘한 강바람이 불면서부터 아이스케끼 장사는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땀에 젖고 비에 젖어 엉망이 된 우리 세 친구도 발가숭이가 되어 물속으로 들어갔다. 온몸이 시려오도록 시원한 강물에서 헤엄치고 노는 동안에는 미처 몰랐는데 물에서 나오고 나니 갑자기 잊고 있던 허기가 밀려들었다. 몇 개의 아스케끼를 먹었어도 그것은 음식이 아니라 팥물 섞인 맹물에다 감미료를 섞어 얼린 얼음조각이었으니 우리의 배고픔은 당연했다.
 
물에서 나와 제각기 벗어놓았던 옷을 찾아 입는데 어찌 된 노릇인지 내 고무신 한 짝이 없어졌다. 물에 떠내려갔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누가 집어간 것 같지도 않은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감쪽같이 사라진 나의 분신과도 같은 오른쪽 고무신, 한참 길 들어진 고무신 한 짝을 잃는다는 것은 내 재산의 절반을 잃는 거나 다름 었었기에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큰 소리로 울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 있나.
 
고무신 잃어버렸다고 배고픔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나루터에서 고기는 형체조차 볼 수 없이 그저 두부와 채소 당면만 조금 들어있는 '고기만두'를 두 개씩 사서 먹는 걸로 늦은 점심을 대신하고는 집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강둑 아래 끝없이 이어지는 철길 따라 걸어가는 어린이들. 아이스케끼 임자는 시름도 많다. 오늘 매상에서 케키 공장에다 지불해야 하는 원금을 빼고 나면 고작 동전 이십몇 개, 하루 생활에 필요한 액수 비하여 너무나 적은 액수......
 
버스요금은 그렇다고 해도 없는 돈에 만두까지 사 먹어야 했을까? 손주가 돈 가지고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실 할머니의 힘없는 얼굴과 점심도 못 먹었을 어린 두 동생 얼굴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여름 해는 어느덧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초저녁이 되었다. 우리는 집집마다 작은 채소밭을 가꾸고 있어 마치 농촌을 연상케 하는 동네를 지나가면서도 틈틈이 아스케끼를 외쳐댔다. 내 키보다 큰 옥수수마다 빨강 수염꽃들을 달고 있었고 짓누른 호박 넝쿨 사이사이에는 노랑 호박꽃 들과 더불어 둥근 호박들이 뒹굴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 가운데 풍겨나가는 밥 익는 냄새와 된장찌개 냄새가 허기진 아이들의 위장을 끝도 없이 자극하였다. 공연히 따라나섰다가 생고생만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깨에 걸린 아이스케끼 통이 더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저물어가는 석양 하늘에 떠있는 애드벌룬이 인상적이었던 어느 동네에서 과외공부 마치고 돌아오던 아이들에게 세 개에 한 개 값으로 아홉 개를 팔았고 엄마 따라 장 보고 오는 어느 자매에게 다섯 개를 한 개 값으로 10개 파는 것으로 그날 장사를 마쳤다.
 
허기지고 걷기에 지친 우리는 이미 반 이상 녹아버린 남은 아이스케끼를 먹기 시작했다. 특히 잃어버린 신발 한 짝으로 낙심한 나는 발바닥 까진 보상심리 때문인지 눈물까지 흘려가며 입안이 얼어 뻣뻣해질 때까지 마구 먹어댔다. 날 저무는 하늘 아래에서 아이스케키를 먹는 어린 인간 셋은 어린이가 아니라 얼음과자에 걸신들린 어린 악귀들로 둔갑돼 있었다..

 

 

그날의 일은 마치 어제 일인 양 생생하게 그리고 천연색으로 또렷하게 생각나는데도 그날 밤늦게 집에 들어가서 무얼 먹고 잤는지, 고무신 잃어버렸다고 무슨 꾸중을 들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그날 이후부터 아이스케끼를 먹지 않았다. 그리고 겨우 두 개 먹어서 너무 아쉬웠던 고기만두도 아무리 먹고 또 먹는다 해도 살쪄서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시절인데도  불구하고  맘껏 먹었던  기억도  없다. 
 
그 후 약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불혹에 나이가 됐을 때 나는 그때 그 코스를 답사하면서 무섭게 변해버린 풍경을 보면서  어떠한 감회에 빠져들었을까?
 
하지만  그 후의  이야기는 또 다른 스토리가 되겠기에 아이스케끼 장수 따라나섰던 이야기로 끝내야겠다. 어제저녁 딸아이가 마켓에서 구입해 왔던 팥 아이스케끼를 먹으면서 불현듯 떠오른 그 시절에 이야기를.....

 

 

 

 

'추억은 아름다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운 설날  (0) 2023.12.23
집으로 가는 길  (0) 2023.12.14
경상도 사투리  (3) 2023.12.05
겨울 매미  (3) 2023.11.20
엿장수 가위 소리  (2) 2023.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