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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아름다워

엿장수 가위 소리

by Seresta 2023. 11. 19.

지금은 사람들 기억 속에 잊혀가지만 엿장수의 가위소리가 동네 개 짖는 소리만큼 흔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과 같이 풍요로운 세월이 못되었기에 단맛을 내면서도 쉽게 만들 수 있던 엿은 가난했던 우리들, 특히 단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의 사랑을  받던 기호품이었지만 시절이 하루 세끼 밥만 먹어도 중류층 대접받을 만큼 어렵다 보니  엿 같은 주전부리는  아이들 스스로가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쩡그렁, 절컥! 절커덕 쩍쩍….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담은 가위소리는 마치 아이들을 이끄는 마술피리 같은 능력이 있었고 때로는 쇳조각 찾아 헤매는 불가사리의 비명처럼 들려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엿을 돈 주고 사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거의 모두는 집안의 빈병이나 못쓰는 양은냄비를 들고 나와 바꿔먹었다. 
 

 

교환 가능한 품목들 중에는 낡은 옷과 천조각, 그리고 헌 고무신도 끼어있었지만 집안에 얼마 되지 않던 고물들을 탕진 한  동네 아이들. 엿수레 좌판 위에  펼쳐진 하얀 엿 검은엿, 깨엿과 낙화생 엿을 한없이 바라만 보는 그들의 눈망울에는 탐욕 아닌 식욕만 가득 담겨 있었다. 

찌그러진 양은 대야만 내다 팔아도 그까짓 엿 한 다발쯤 못 살까 봐, 할아버지께서 잘 신지도 않는 고무신만 갖다 줘도 둥근 깨엿 한 점쯤은 간단히 구할 수도 있으련만 없는 살림도구에서 어려운 삶을 꾸려가는 부모에게 엿 한 조각을 원하는  자녀들의 성화 정도는 얼마든지 무시해도 되는 일상 중 하나였다. 
 
동네마다 울려 퍼지는 엿가위 소리가 전성기를 구가할 무렵, 달콤한 엿을 갈망하나 집안의 고물을 탕진하여 더 이상 구입할 방도가 없는 극빈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신종 엿장수가 나타났다. 

 

그들은 온종일 다리품을 팔아 얻은 대가로 삶을 유지하던 선량한 엿장수들과는 달리 더욱 먹음직스럽고 더욱 큼직한 엿으로 판단력 모자라는 어린 소비자를 어린도둑으로 변질시키는 악덕 엿장수였다.
 
이미 첫 돌잔치 때부터 자기 앞에 놓인 연필을 힘차게 잡았다고 해서 문중의 기대를 흠뻑 받았다는 꾀돌이는 부모님의 심부름이라면 도무지 마다할 줄 모르는 착한 심성을 가진 아이였는데 바로 그런 자들 유혹으로 그 어린 나이에 문제아로 변신된 것. 
 
한 움큼의 엿을 위해 엄마가 아끼고 잘 쓰지 않는 냄비를 엿과 바꿔먹은 것을 시작으로 누나의 색동저고리와 할아버지의 마고자, 아빠가 아끼고 잘 입지도 않는 모직 외투마저 엿장수로 포장된 장물아비 수레 속으로 들어갔다.  
 
꾀돌이의 이와 같은 행위는 여러 동무들에게 본이 되어서 한 달간 맘껏 먹기로 엿장수와 합의하고 제 동생 돌 반지 들고 나간 영수. 앞집의 꾀순이는 엄마가 장롱 속 깊이 간직해 놓았던 금비녀를 들고나가 수레 위에 엿 모두와 그 안에 담겨있던 잡동사니 일체를 받아 동내아이들에게 나눠주는 호기도 부렸다. 
 
이렇게 철 모르는 어린 도적들과  늙은 장물 아비간에 거래가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 드디어 꾀돌이의 절도행각이 발각되면서  다른 아이들의 절도행각까지  낱낱이 드러나는 바람에  그날 하루, 그 평화롭던 동네에는 꼬마 도적들이 제 부모들로부터 매 맞으며 내는 울음소리로 가득 찼었다.  
 
무궁한 세월 동안 가장 맛 좋은 음식으로 꼽히던 엿이 그보다 몇 배나 더 달콤한 설탕의 출현으로  언제부터인가 소비자들의 외면 속에서 토속음식으로 물러났고 울던 아이들까지 멈추게 했던  정겹던 가위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가엾은 소년소녀 가장 사연에 눈물짓던  예전 아이들에서 춤 잘 추고 노래 잘하는 아이돌 그룹에 환호하는 아이들로 바뀌어졌 듯, 이젠 예전의 쌀 엿 호박 엿 보다 훨씬 달고 향기로운 과자 캔디들이 즐비하여도 웬만해 가지고는 아이들의 시선도 못 끄는 시절이 되었다.
 
부모님과 형과 언니들이 겪었던 고생을 모르는 요즘의 꾀돌이 꾀순이 보다는 비록 엿 한 조각 먹기 위해 집안 도적질 마저 마다하지 않던 그 시절의 아이들이 더욱 정겹고 순수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나 만의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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