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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아름다워

겨울 매미

by Seresta 2023. 11. 20.

 

 

당대 할리우드 명배우 찰톤 헤스톤이 주연으로 나왔던 성경 스토리 영화가 장안에 화제가 되던 해 봄. 우리 가족이 살던 동네는 서울 사대문 밖 변두리 동네라서 포장된 도로가 거의 없는 지역이었다.
 
신호등 없는 네거리, 가파른 골목길 입구에 쑥돌로 쌓아 올린 높직한 축대가 특징이었던 우리 집은 동네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이정표나 다름없었다. 자전거 수리점은 저기 축대 높은 집에서 왼쪽에서 삼분 거리. 솜틀집은 축대 높은 집 옆 골목길 여섯 번째 오른편 집...

 

겨우내 얼어 있던 도로가 모두 녹은 봄날. 우리 집 맞은편 작은 공터에 리어카 좌판이 들어섰다. 얼마 되지 않은 좌판 위에는 그림딱지와 나무팽이. 엿과 사탕, 마른오징어, 참 빗과  파리채 같은 주부 용품들, 심지어 어른들을 위한 술과 담배도 놓여 있었다.

 

 

계절 따라 해삼이나 번데기 그리고 엿 장사가 들어와도 텃세 부리는 법 없이 같이 장사할 수 있게 배려하던  좋으신 분들. 이른 아침 리어카를 끌고 오신 아저씨는 곧바로 채권 판매 나가시고 장사는 아무 때나 어린 딸을 업고 있던 아줌마가 하셨는데  두 내외분은 이미 대학생 자녀 둘과 중학생 하나 국민학생 둘, 그리고 미 취학 막내를 두고 계셨던 우리 부모님 만큼이나  나이 들어 보였다.
 
자상하신 아주머니는 사이좋게 놀던 아이들이 다툴 때면 말려 주셨다. 놀다가 다치는 아이들이 찾는 곳도 약 솜과 반창고와 빨간약 등을 상비하고 있던 수레 가게였고   그 시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던 장난감 총알심 박힌 팽이가 잘 돌도록 교정시켜 주는 일도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오시는 주인아저씨의 몫이었다.


 

버스 정류장  전봇대 옆 공터는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머리 큰 녀석들의 쉼 터, 그리고 주부들의 정보 교환 장소이기도 했다. 퇴근길 술 취한 가장들의 비틀 걸음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지만 저녁노을 질 때까지 땅바닥을 도화지 삼아 석필 장난하던 아이들, 유리구슬 놀이 딱지놀이하는 아이들의 모습들도 늦가을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어둠 깔린 저녁에 중학입시반 아이들이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조선조 역대 왕 외우는 외는 소리가 들려올 무렵 동네의 한 풍경이 되었던 리어카는 사라지고 길가에 고인 물이 얼기 시작하는 겨울이 돌아왔다.
 
토끼털 귀막이에 벙어리장갑을 끼고 걸어도 땀 한 방울 나지 않을 만큼 추웠던 어느 날 저녁, 학교에서 돌아오던 나는 우리 집 담에 붙어있는 어떤 물체를 보았다. 마치 나무에 붙어 있는 한 마리의 매미와 같이 , 높은 우리 집 돌담 아래 벽에 정체 모를 나무궤짝 하나가 붙어 있었다.

 

봄 여름 내내 아이들의 사랑을 받던 리어카 매점이 내가 학교 다녀오는 사이에 우리 집 담에 붙은 가게로 변신되었던 것. 간판은 없었지만 신판 만화책에 엿과 사탕 오징어, 게다가 고구마도 구어 파는 가게가 바로 우리 집 담 아래 생겼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던 사건이었기에 철 모르던 나는 좋았지만 집안에는 난리가 났다.
 
어머니와 누나들은  우리 집 담에 지저분한 판잣집이 웬 말 이라며 펄펄 뛰셨지만 아무 말씀도 없이 담배만 피우시던  우리 아버지. 노점상 내외가 당장 어디로 갈 곳이 없다며 이번 겨울만 지나게 해 달라는 두 내외의 간청을 도저히 거절할 도리가 없으셨다고.
 
이웃 분들의 항의가 아주 없던 것은 아니지만 평소 아이들에게 잘 해 주시고 동네 주민들에게도 친절했던 행동 덕분으로  동네  주민들의 암묵적 허락 속에 우리 집 축대 밑의 구멍가게는 아침 해가 뜨면 열었다가 저녁 해가 지면 닫았다.
 
함박눈 내리는 겨울밤. 온돌 바닥에 엎드려 만화 책장 넘기는 행복감은 만능의 휴대폰과 전자게임에 익숙해진 요즘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으리라. 몹시 추운 밤, 남의 집 처마 아래서 바람 피한 경험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작고 누추한 방이라도 찬 바람만 막을 수 있다면 천국이 따로 없다는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리라.

 

 

음력설 지나고 되지 않던 그날 새벽은 그해 겨울 가장 추웠던 날이었다.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밖이 소란해졌다. 웅성대는 사람들 가운데서 탄식소리가 터져 나오고 여인들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세 식구가 잠을 자던 도중에 어린아이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참변을 당했다는  것. 어떻게 상자갑 같은 곳에서 잠자다가 그런 변고를 당했을까? 아- 가엾고 참혹한 현실. 그분들은 그 비좁은 공간에서 생활까지 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파출소에서 사람들이 나와 조서를 꾸민다며 복잡한데 만화가게 아저씨는 처절하게 우시고 아줌마는 마치 넋 나간 사람 모양 석고를 빚어 만든 형상처럼 핏기 하나 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평소 그들의 존재를 못 마땅하게 여겼던 이웃 동네 아주머니도 우셨고 동네 아저씨들은 불쌍한 부부를 위해 모든 장례 절차를 주선해 주셨고 위로금도 모았다. 그리고 이튿날 구청 사람들이 나와서 그분 들의 생업현장이자 보금자리를 아주 간단하게 철거해 감에 따라 한 시절 동네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던 작은 만화가게는 그렇게 영원히 사라졌다.

 

우리 집에서 이틀 밤을 지낸 내외분이 어디론가 떠나시던 날, 동네 애들을 불러 모아 만화책들과 사탕 과자들을 골고루 나누어 주시는데 주는 이들도 울고 받는 아이들도 우는 슬픈 그림이 우리 집 마당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봇짐을 지고 들며  석양빛 깔린 언덕길 아래로 내려가던 그분들의  뒷모습은 모두가 어렵게 살아야만 했던 암울한 시대의  아이콘으로서  그분들이 겪은 비극은   당시  주변에서 그리고 신문지상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었던 슬프고 가슴 아픈 사연들 중에 하나였다. 
 
그런 와중에도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함께 아파 하고 같이 슬퍼해 주는 이들이 많아서 쉽게 절망할 수 없었던 그 시절의 모습.  굶지 않고 하루 세끼만 먹을 수 있다면 그지없이 행복했던  그 시절 사람들에는 요즘 쉽게 찾을 수 없는 긍휼과 자비와 사랑의 향기가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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