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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아름다워

경상도 사투리

by Seresta 2023. 12. 5.

 

이북 실향민의  가족 일원으로  서울 한복판에 태어난 내가 처음으로 경상도 사투리를 청취했을 때 느꼈던  놀라움과 경이로움은  아직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다. 

" 여러분!  저~먼 남쪽 대구에서 전학해 온 김.영.순. 인데 모두 잘 지내기 바란다".
 
칠판 앞에서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쿠고 있던 낯 선 여학생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새롭게 마련된 제 책상으로  가 앉았다. 개학 한 지 두 달 만에 우리 반에 합류 한 영순이는 대부분의 소녀들의 헤어스타일이던 짧은 단발머리를 하고 있어 외관상으로는 서울 소녀들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으나 유난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한 달 두 달, 석 달이 다 가도록 항상 혼자였고 누가 말을 걸을 때면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으나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어 시간. 평소와 같이 받아쓰기를 마치고 읽기 순서로 들어갈 때   선생님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지적하지 않았던 영순이 보고 읽으라 하셨다.  읽을 내용은 2페이지 분량의 형과 아우의 우애를 그린 달밤에 볏단지기. 


 
“…. 늦은 밤 형님은 볏단을 등에 지고 아우 논 방향 가던 중 저만치에서 어떤 사람이 역시 볏단을 등에 지고 걸어오는데 바로 그 순간,  환한 달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추더니 형님-. 아우야_  형제는 볏단을 내려놓고….”

 

아름답고 감동 깊은 형제간의 이야기라면 깊은 감동으로 모두가 숙연해야 마땅한 교실 안에는 이것 저곳에서  기이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다가 어느 한 녀석이 참던 웃음을 뿜어내는 것을 신호로 온 교실이 떠나갈 듯한 대형 폭소로 이어졌다. 

아ㅡ 가여운 대구소녀 순나. 책에 쓰인 고대로 읽었건만 억양이 많이 달랐던 것.
 
아이들은  책상 위에 엎어졌고  사태를 진정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당시 미혼의 몸이었던 선생님마저 웃음을 참느라 책상에 엎어지면서 교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쓰여 있길래 그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 궁금증을 참지 못한 열댓 명의 아이들이 일제히 우르르 몰려가 읽다 말고 책상 위에 얼굴을 묻은 영순이의 교과서를 들여다보느라 생난리를 쳤으니 소녀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 울면서 조퇴한 영순이는 그 후 몇 날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더니  결국 학교를 옮기고 말았다. 
 
그 후 서울은 발전하고 변모하면서 많은 인구 유입에 따라 경상도 사투리는 이제 하나도 신기하지도 별스럽지도 않게 되었는데  거창에서 올라왔다는 절친의 사촌 여동생의 억양은 애교, 그 자체였고 부산서 올라왔다는 한 청년의 억양은 거칠고  무뚝뚝했었다.
 
세 살 때 부모님 따라 대구에서  엘에이로 이주한  어느 한인 영어강사는   미 본토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수강생들의 발음을 교정해 주면서도 정작 자신은 의사를 어사 또는 어이 사라고 발음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후부터 세상에서 가장  고치기 힘든 억양은  대한민국 경상도 사투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머나먼 훗날까지 영원토록 변치 못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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