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억은 아름다워

그리운 설날

by Seresta 2023. 12. 23.

 

마지막에 내렸던 눈이 길바닥을 빙판으로 만들어 행인들을 괴롭히던 어느 해 설날 아침. 당시 아직 엄마 뱃속에 있던  동생과 두 살이었던 내 바로 밑에 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집에 남고, 나는 형과 누나들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큰아버지 댁으로 갔다.
 
드 넓은 백부님 댁 마당은 이미 열댓 명은 족히 넘을  열 살 미만짜리 꼬마들의  놀이터로 변했고 그중 몇몇 아이들은  한바탕들 했는지 눈가에 눈물자국들로 얼룩져있었다. 
 
안방에는 아버님의 형제분들과 몇몇 당숙님들의 술추렴이 한창이었고 그 와중에 웬 담배들은 그렇게 들 피워대시는지 그 뿌연 연기 속에서도 숨 쉬며 앉아있는 모양새가 무척 신기했다. 
 
부엌에서는 백모님과 숙모님. 고모와 사촌 누나들이 어울려 음식 만들고 나르시느라  한참 분주한데 아이들까지 아우성들이었으니 그 시끄럽기란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또래 아이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였던 나는 마당 한구석 장독대에 앉아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바라보며 설날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평소 까불기로 소문난 나 보다 일곱 달 어린 사촌 아우가 내 곁으로 와서 이상한 음정으로 내 노래를 따라 부르며 방해하다가 나에게 얻어맞고 크게 우는 사태가 벌어졌다
 
때가 되어 모일 적마다  또래 조카에게  맞고 우는 아들 때문에 많이 속상해하시던 숙모님. 그날따라 더욱  크게 울어재끼던  아들 모습에 그만 이성을 잃으셨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어린 내 머리를 몇 차례나 세게 쥐어박고 고개가 번쩍 들려 모가지가 늘어날 만큼 양쪽의 귀까지 마구 잡아당기는 이성 잃은 행동으로 흥겹던 분위기를 썰렁케 했으리오?  
 
어른들은 숙모님의 엽기적 분노조절 장애현상을 조카의 막돼먹은 행실을 바로잡기 위한 사랑의 매질이라는 신속한 결론으로 별 일은 아니다로 종결지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엄마가 계셨더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불쌍한 어린 아들의 억울한 상황을  그럴 수도 있는 일처럼  일관하시는 어른들 모습에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 큰 사내 녀석이 우는 것은 창피스러운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윽고 아이들이 애타게 고대하는 세배하는 순간, 아니 세뱃돈 타는 순서가 되었다. 

 

사촌들이 흉내 낼 수도 없을 정도의  다양한 레퍼토리와  가창 실력을 갖고 있던 나는  절해서 받는 돈 보다 노래 불러서 받는 돈이 오히려 많았기에  설날은 그야말로 횡재하는 날이나 다름없었다.


 
조금전 나에게 맞았다고 크게 울었던 사촌 아우는 차렷 자세로  고드름을 삼절까지 불렀고, 전날 너무 바짝 깎여진 단발머리가 애처로운  육촌 누이동생은 두 손을 얌전히 잡고 지금은 아무리 찾아도 찾지도 들을 수도 없는 잊힌 동요 “산 높고 물 맑은 우리 마을”을 불러서 꽤 많은 박수를 이끌어냈다. 
 
다른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라서 설날, 개나리, 반달 같은 학교에서 배운 동요나 불렀을 따름인데 나는 조금 높은 수준의  동요 하나. 거기에 외국 가곡과 한국 가곡 두곡을 단숨에 불러재끼는 실력을 뽐내었다. 
 
처음 부른 곡은 우리집에서 잠깐 일하다 고향으로 돌아간 가사도우미 누나에게 배운 기러기라는 조금 슬픈 동요였고 앙코르를 받아 부른 두 번째 곡은 성악에 소질이 있던  작은 누나로부터 전수받은 희망의 속삭임, 거기에 기왕에 부르는 노래  한곡 더 하라는 요청을 받고 불렀던 곡이 우리 학교 선생님께서 소풍 갔을 적에 부르셨던 사공에 노래라는 한국 가곡이었다.
 
온 종일  계속되던 잔치는 한 가족, 두 가족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면서  종결되었고 우리도 만취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와서 우리 가족만의 단란한 설 잔치로 계속 이어졌다.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던 엄마 품에 안겨 세뱃돈과 노래해서 받은 돈을 드리며  머리칼을 헤치고 숙모님에게 맞았던 머릿속의 상처도 낱낱이 보여 드렸다.  
 
"아니 애들이 놀다가 다퉜다고 이렇게 상처가 날 정도로  때리면 어쩌나!"  내 머리를 어루만져 주시며 날 벌주신 숙모님 대신 마주 보이는 벽장에게 보내는 어머니의 큰 호통 소리에 나는 그만 참고 있던 설움이 복받쳐 올라 큰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슬픔이란 금세 찾아왔다가 금방 사라지는 무지개와 같은 것. 이내 낮에 불렀던 노래들을 재탕해 불러 식구들의 갈채를 받았던 그 시절의 까치설날 풍경.  
 
그런데 어째서  내가 받은 세뱃돈과 노래 불러 받은 돈 모두를 엄마에게 드려야 했는지, 무슨 연유로 평일에는 그렇게 맛있던   백설기나 인절미 같은 떡과 배나 감 같은 과일들이 유독 설날과 같은 명절에는  그저 그런 맛이었는지는  지금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땅한 해석은 나오지 않는다.

 

'추억은 아름다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번 죽은 사냥매  (1) 2024.03.27
하늬바람  (1) 2024.02.18
집으로 가는 길  (1) 2023.12.14
팔다 남은 아이스케키  (1) 2023.12.06
경상도 사투리  (3) 2023.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