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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촉새들의 모임

by Seresta 2024. 1. 21.

 

 

다수의 인원이 모이는 장소에 참여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다. 모임 시간에 늦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모임 성격에 걸맞은 의복과 구두와 청결상태도 꼼꼼히 챙기지 않을 경우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참석자들 간에 대화 주제도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사람들마다 생각이 상반될 수 있을 정치나 시사에 관한 내용을 논하다가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기에 그저 '별 부담 없는' 얘기들.... 

 

이를테면 날씨가 지극히 더워서 못살겠다던가 좀처럼 그칠 줄 모르는 불경기 탓으로 그만 칵 죽고 싶은 생각이 날 때도 있다는 식의 누구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는 위로도 될 수 있을 평범한 화제들이  가장 무난할 듯싶다.


수년 전 어느 모임에서 일어났던 해프닝. 

그 밤에 모인 열두 쌍의 부부들의 식사가 거의 끝나갈 즈음  누군가가 당시 한인사회에서 커다란 이슈였던 부부 사기계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 좋은 평판을 받던 멀쩡한 부부가 거액을 챙기고 잠적하여 주위사람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던 사기계 사건이 화제에 오르자 너 나 할 것 없이 자신들의 돈 떼인 경험담을 한 마디씩 하다가 일순간 잠잠해졌다.

 

모임 일행 중 곗 돈 떼먹은 전과를 가진 커플이 무려 셋이나 끼어 있다는 현실을 뒤늦게 생각해 낸 것. 
 
갑자기 썰렁해진 분위기를 만회하려 내가 자리에 일어섰다. 그리고 약간은 익살스런 표현을 써가며 평소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던
일부 아줌마들의 꼴 불견을 열거하던 도중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요사이 한참 뜨고 있는 유행이라며 본인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의상과 신발 착용.  노랑 빨강 다양한 색상의 모발 염색.  보톡스 주사로 얼굴 부풀리기와  큰 주사 바늘로 엄한 복부지방 빼기. 그리고는 다시 건강에 해가 되는 지나친 다이어트등을 성토하려는데 곁에 마누라가 내 종다리를 마구마구 꼬집어대는 바람에  문득 눈을 내려 좌중을 돌아보니 모든 여인들의 성난 눈총들이 나를 향해 쏘고 있었다. 

 

말 몇 마디 경솔히 꺼냈다가  즉각 꽁지 잘린 수탉 신세로 추락된 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당 못해 자리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었을 때 이번에는 '골프 벌레'라는 민망한  별명을 가진 친구가 급냉각된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골프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는 어느 일정한 기간 동안 자신의 핸디, 즉 자신의 타점을 낮추지 못하는 사람은  머리가 아주 나쁘기 때문이라는 확고한 지론을 갖고 있어 아무리 애를 써 본들  늘지 않는 본인의 기피대상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공 이 너무 안 맞아서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던 골프 동반자에게 머리 나쁜 사람은 골프를 포기해야 된다는 입바른 소리를 잘 못 꺼냈다가  무수히 처 맞을 뻔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그자의 골프 이야기가 좀처럼 끝 낼 기미가 안 보이자 평소 내기골프에서 아무리 잃는다 해도 불평 한 마디 없이 돈 잘 내는 점잖은 분으로 소문난 육십 대 초반의 봉제공장 사장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일 갈 하셨다.

 

"이런 자리에서도 골프 얘기에 열 올리는 인간!   나, 다시는 사람으로 안 보네!" 

어이구 저 양반 얼마나 지겨웠으면. 그분은 내기골프 도중 혈압이 치솟아서 구급차에 실려 갔던 사연이 있는 분이었다.
 그날 밤의 모임은 예정보다 엄청 빨리 끝났다.
 
-사람들이 말이야 도무지 눈치들이 없어요.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못하고 말이지.

-당신은 뭐 좀 나은 줄 아는데 오늘 모였던 부인들 중에 성형수술이나 다이어트 안 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그리고 여자들 머리에 물들이는 거. 그게 뭐 어때서요?

- 이 사람이 정말.... 그런데 아니 이게 뭐야! 오늘 미장원에 간다더니 염색했잖아. 그러고 보니 노랗고 까맣고 붉은색마저 간간히 끼어있네.
 
등잔 밑은 정말 어둡고, 촉새 또한 따로 없으며, 남의 말할 것 하나도 없다는 현실을 절실히 깨닫게 해 줬던 슬프고 쓸쓸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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