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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어머니의 반지

by Seresta 2024. 4. 13.

 

여자의 마음이라고 하면 먼저  유명한 이태리 가곡의 제목이 떠오릅니다. 귀부인은 마치 갈대와 같이 바람에 흔들리네 로  시작되는 그 오페라 가곡의 가사 때문인지 나 역시도 노랫말 주인공의 여자가 되려면  사랑에 울고 웃을 수 있는 젊은 여성, 아무 때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정렬적인 여성에 국한된 줄만 알고 살아왔다가 최근에 들어와서야 잘 못 생각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인의 마음은 자신이 사내아이들보다 곱다고 느끼기 시작하는 7살이나 많이 연로하여 얼굴에 주름이 생겨버린 77세이나  마음은 같다는  사실을 깨우쳐준 분은 다른 사람도 아닌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작년 초에 있었던 사연 하나..

12월이 시작되면서  잦아지는 각가지  연말 모임으로  집에서 식사하는 기회가 거의 없다 보니 어머니과 대화할 시간마저 없더군요. 그러다가 성탄절  며칠 앞두었던 20일쯤 어머님께서 며칠 동안의 누적된 피로감으로 얼굴 잔뜩 찌푸리고 출근하려던 나를 부르셨어요.
 
심상치 않은  어머님 호출에  나는 나 아니면 집사람이  무슨 잘못한 것은 있는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언젠가 제가 무슨 말을 잘못하였다고 무척 섭섭하신 나머지  아무 아파트라도 얻어 따로 나가 사시겠다고 하시는 바람에 저를 곤경에 빠트리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기 때문이죠. “요즘 모임이 많다 보니 어머님 얼굴도 제대로 못 뵈었네요.” 


“아비야 우리 교회 할머니 중에서 돌 박힌 반지 아니 낀 할머니는 나 밖에 없더구나.  나도 제대로 된 반지 한 개쯤은 있어야 할 것 같다. 아무것도 끼지 않은 내 손이 너무 허전해서 그래"

이런 거 이제 필요 없으시다며 어머님의 액세서리들 모두, 심지어 칠순 잔치 때 해드렸던  에메랄드 반지까지 모두 며느리들과 교회 권사님들에게 나누어 주신지가 언제라고  다시 또 보석반지를  끼고 싶다는 어머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어 그렇게 다시 반지를 원하실 거면 왜 모두 처분하셨냐고 물었습나다.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내손이 허전해서 그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연말을 피해 다음 달 중순쯤에 보석상에 모시고 가겠다는 약속을 드리고 어머님 방에서 나오는 나의 머릿속은 의문투성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팔순 어머님으로 하여금 새 보석반지를 원하시게 했을까?

 

출근길에 들어섰어도 내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이미 십여 년 전에 패물에 대한 모든 미련을 끊으셨던 분이지만  여전히 새 옷 입으시기를 즐겨하시고, 며느리가 쓰는 화장품이라면 당신도 반드시 갖춰야 하는 약간의 까다로운 면도 있으시며 심지어  잠에서 갓 자리에서 일어나신 모습을 아들인 나에게도 아니 보이시는  깔끔한 면모도 보여주시지만 왜 이제 와서 오래전에 인연 끊은 반지를 원하시는지  도통 알 수 없었던거죠.
 
상점들마다  수많은 구매자들로 법석이던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새해 들어와 여러 가지 밀린 일들을 하느라 어머니와의 약속마저 잊고 지내던 나는 어머님으로부터 한 말씀 들어야 했습니다.

 

사람이 사준다고 했으면 가타부타 무슨 말이라도 있어야 하거 늘 연말 다 지나고 새해가 들어선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지나도록 뭣 하고 있냐는 어머님의 노기 어린 말씀에 나는 만사 다 제쳐놓고 어머님을  모시고 보석도매상으로  갔습니다. 수백 개의 보석상점들이 모여있다는 엘에이 다운타운 보석 도매상 건물로 들어서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금붙이들은 죄다 쇠붙이로 보였고 온갖 보석들도 물감 입힌 유리알처럼 보였을 만큼 온갖  귀금속과 보석들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막상 내가 사드릴 수 있는 반지,  어머니가 원하는 보석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지요.

 


아유~ 할머님 어서 오세요. 여기 이 오팔 반지는 어떠세요? 이런 반지가 한복에도  잘 어울려요.” 
반색하고 맞아주는 한인 보석상 주인아줌마의 집요한 권유에도  어머니의 시선은 줄 곳 다른 데 있었죠.
 
당신께서 어떤  반지를 원하는지 딱 부러지게 말씀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원하시는 반지는 오팔이나 진주가 아니라 에메랄드 반지나 다이아몬드 반지라는 것을. 


“저 것 좀 봐요” 
어머님은 드디어 맨 처음부터 맘에 두고 계셨던 반지, 그러나 짐짓 미처 못 보신 것처럼 외면하던 아주 예쁜 반지를 물어보셨습니다. 

일 캐럿 크기의 최상급 다이어반지를 지목하시는 어머님 눈빛은 샛별처럼 반짝이는데 눈이 화경 등 만하게 커진 보석상   주인은 비싼 가격에 주눅이 들어 눈 내리 깔고 있는 내  얼굴을 몇 번씩이나  훔쳐보더니  이 반지도  괜찮습니다만 하며 거의 그 다이아 만한 크기의 다른 반지를 내 보이며 가격을 일러주는데 추측했던 값보다  훨씬 저렴했지요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흠집은 있어도 컬러와 투명도는 상급이죠. 쓰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기에  근래에는  가성비 좋은 보석이 잘 팔리는 추세랍니다. 

눈치 정말 빠르신 보석상 사장님의 속삭임. 나는 망설임 없이 그 다이어반지를  구입하여 어머님  왼손의 중간 손가락에 끼어드리며 모처럼만에 효자 노릇을 한 것 같아서 마냥 기뻤고 어머님 역시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당신 손가락에 끼어진 반지를 이리저리 바라보시며 흐뭇해하셨습니다.

 

저녁 식사 때 반지 낀 손가락을  며느리에게 보여주시며 말문을 여신 우리 어머님.
오늘 아비가 사 준 이 반지 어떠냐?  
예. 어머님 아주 예쁘고 잘 어울리네요.
그런데 이 다이아 속에 작은 흠이 있다는구나.

 

세상에... 어머님의 청각은 여전히  정정하시어  보석상 주인의 속삭임을 모두  들으셨습니다.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나의 얼굴은 어차피 눈에도 보이지 않는 흠이라니  괜찮다는  어머님의 위로에도  좀처럼 식어지지 않았죠.  
 
어머님은 그렇게 반지를 구입하셨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시도 때도 없이 그 반지를 끼고 계셨죠. 나는 어머니께서 동네 할머님들께 보여주시려고, 교회분들께  아들에게 받은   선물 자랑하시려고 반지를 사신 줄만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진정한 여자의 마음, 세월이 흘러도 절대로 변 할 수 없는 여자의 본성을 몰랐던 나의 속단이었습니다.
 
어느새 주름이 잡히고 뼈마디가 드러나게 가늘어진 울 어머니 손가락. 어머님은 누구에게 보이고 싶어서가 아닌, 혹여라도 

예쁜 가락지라도  끼고 있으면 조금이나마 가려질까 반지를 원하셨던 것이죠.
 

 1999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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