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큰 아들은 재 작년에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수년간에 공부가 힘들었던지 졸업하면 곧 가기로 했던 대학원 입학까지 보류하고 제약회사 연구소에 취직했다. 한 일 년 정도 일 하고 나서 다시 공부하겠다는 결정을 스스로 내릴 만큼 아들은 성숙 해진 것이다.
아빠를 바라보는 눈빛도 변했다. 예전의 눈빛이 약간의 경외심이 곁들여진 친근감에서 애틋함과 측은지심이 골고루 섞인 그런 눈빛은 내가 딱 고만한 나이에 내 아버님을 바라볼 때 발하던 눈빛이었으리라.
언제나 든든한 언덕인 줄 알았던 아빠의 나약 한 면을 알게 될 정도로 성인이 된 아들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갈수록 빨라지는 세상변화에 뒤처지는 아비의 보호자 위치에 서려하는 녀석 태도에는 고마움 보다 괘씸하다는 마음이 컸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음악에 상당한 재능을 보여왔다. 피아노 바이올린 은 수준급이었고 저 홀로 터득한 기타 연주 실력도 상당했다. 게다가 음악전공자들도 쉽지 않다는 절대음감 마저 갖추고 있어 소리만 듣고도 계명을 알 수 있을 만큼 재능도 있고 또 본인도 음악을 좋아하여 음대 계통으로 가기를 소망했었다.
하지만 장차 취직에 무난한 전공을 강력히 권고했던 내 뜻에 순종하여 음악이 아닌 컴퓨터 사이언스과에 들어갔지만 너무 어렵다고 바이오 계통으로 바꾸어 전공한 아들은 아비의 강력한 권유를 따르느라 자신이 원했던 음악을 못했던 반발심에 대학원 코스 대신 취직을 택한 것 같은데 한 두 달 다니다 말겠지 했던 나의 추측과는 달리 아들의 직장생활은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평소 보다 조금 늦게 들어온 아들은 느닷없이 수염을 한 번 길러보겠단다.
친가 외가를 통틀어 수염 단 사람 하나 없는 무수염 가문의 전통을 자신이 깨겠다는 큰 아드님 말씀에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호령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말했다. 그래. 너도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너 하고픈대로 해봐라. 아들은 운동한다며 나갔고 그때까지 내 눈치만 보고 있던 아내가 자신의 의견을 내었다.
“당신이야 수염 숱이 시원치 않으니까 기르고 싶어도 기를 수 없지만 저 아이는 머리숱도 많은 데다 윤기까지 흐르니 수염 기른다 해도 흉해 보이지는 않겠어요. “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몹시 불편했던 내가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하냐고 인상 쓰며 따졌더니 집안에 만만한 게 오직 나 밖에 없냐며 짜증 내는 아내와 한바탕 고성이 오가는 말다툼을 해야 했다.
아들의 모습은 매일 조금씩 달라져갔다. 처음 한 주간은 차마 봐줄 수 없을 만큼 지저분했었는데 보름 그리고 한 달이 지나자 제법 그럴싸한 모습으로 변신했다.
윤기 자르르한 털들이 귀 아래부터 입가에 그리고 턱까지 무성하게 돋아난 것이 얼핏 보면 영화의 주인공 닥터지바고와 흡사했고 어떻게 보면 말 타고 천하를 호령하던 옛날 장수의 모습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이제 털보로 변신한 아들은 없던 버릇이 생겼다. 배달민족 고유의 정서, 한국적 사고방식으로 볼 때 좀처럼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 나타난 것이다. 내 곁에 앉아 tv뉴스 시청할 때도 까만 털들이 밤송이처럼 돋아난 제 턱을 쓸어대었고 심지어 저녁식사 와중에서도 입가에 수염을 쓰다듬곤 해서 얼굴에 털 한가닥 없는 내 몰골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직장에서도 싫어할 텐데 이제는 그만 깎으라고 몇 번씩이나 권유해도 아들은 건성으로 곧 깎을 것이라고 대답했을 뿐 전혀 깎을 기미가 없더니 지난주일, 그동안 잘 다니던 직장에서 잘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실직 할 만한 사유는 없었다고 아들은 강조했지만 유리안경에다 두건과 마스크까지 착용해야 하는 청결제일 주위의 연구소 인 만큼 아들의 덥수룩한 수염 탓 같았다.
입사한 지 일 년도 못 채우고 퇴직당한 아들은 저녁 식사 내내 말이 없었다. 내 눈의 착시현상 때문인지 전날까지도 탐스러웠던 아들의 수염은 이제 황무지의 잡초처럼 윤기를 잃고 있었다.
다음 날 아들은 말끔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 무성하던 수염들을 깨끗하게 밀어버린 것이다. 중후한 청년 모습에서 다시 본래의 앳 띈 모습으로 되돌아간 아들을 한번 안아주었더니 무척이나 어색해한다.
나는 그날 밤 침대에서 웃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 혈육이 인생 첫 직장에서 쫓겨났는데도 으흐흐 웃음이 나오고 만 것이다.
일 나간다는 이유로 그동안 미뤄왔던 대학원 코스를 시작하게 되어 웃었고, 털북숭이 징그러운 아들 대하지 않게 되어 웃었는데 아내는 달랐다.
직장에서 쫓겨난 아들이 수염 깎고 말끔해졌던 날, 나는 미소를 멈출 수 없었는데 아내는 뭐가 그리도 슬픈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