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바니는 제노바 출신의 이태리 청년으로서 숱 많은 갈색 장발에 여자 못 지 않은 수려한 용모를 가진 청년이다. 예의 바르고 호탕한 면모도 있어 많은 여자들이 따랐는데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살아온 탓인지 세상 이치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고 특히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하는 독선적인 기질로 인해 남에게 상처 주는 일도 적지 않았다.
까만 흑발에다 우유같이 하얀 얼굴의 베로니카는 그녀 이전에 죠바니를 거쳐간 뭇 여성들과는 아주 다른 타입의 여성으로서 차분하면서도 매우 이지적인 성품의 소유자라서 첫사랑 죠바니가 자기를 버리고 다른 여성의 품을 찾아갈 때만 해도 그에게 매달리기도 했고, 그와 친하다는 이유로 잘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도 그이의 마음을 돌리게 해달라고 호소했지만 한번 돌아 선 연인의 마음은 변할 줄 몰랐고 오히려 새로운 여인에 대한 연정으로 가득했을 뿐이다.
자신의 무책임한 애정 행각이 한 여자를 불행케 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죠바니가 크나큰 마음의 상처로 반 실성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전 연인의 심정을 어찌 이해할 수 있으리? 새 연인이야 말로 여생을 함께 할 숙명의 여인이라 믿은 그는 약혼식 치르기가 무섭게 결혼 준비에 돌입했다.
사랑의 보금자리 얻고 예복과 예물 준비하고 결혼식, 피로연 장소를 고르고 초대할 하객들 명단 짜기에 바쁘게 돌아가던 죠바니에게 한 통에 편지가 날라 왔다.
“요즘 마법사에게 당신에 대한 저주를 빌고 있어요.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내게 돌아와 주세요.
나를 이렇게 버린다면 이 세상 어느 여자와도 행복할 수 없을 겁니다. “
ㅡ아직도 당신만을 사랑하는 베로니카ㅡ
죠바니는 매우 솔직하였다. 그녀의 저주를 생각하니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미안한 마음마저 사라지면서 오직 징그럽고 그녀가 청부한 마법사의 저주가 겁난다면서 온몸을 한차례 떨기까지 했다. 여자의 순정과 순결을 가문과 자신의 자존심으로 연결하는 경향이 짙은 한국에서라면 또 모르겠는데 만났다 헤어지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서양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납득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결혼식 날이 성큼 다가왔다. 수백 장에 달하는 청첩장들은 모두 전달되었고 식 올릴 성당 장식도, 연회를 위한 음식 준비도 모두 다 마쳤다. 어둠이 깔린 토요일 저녁, 식장에 성장을 한 남녀들이 물려오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한 세명의 신랑 들러리들이 입장 준비하느라 한참 어수선할 때 보라색 드레스 차림의 베로니카가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나는 심장이 멎을 만큼 깜짝 놀랐다. 미움과 슬픔에 젖은 그녀의 표정이 너무 섬뜩한 나머지 죄도 없이 떨고 있던 내게 그녀는 결혼 선물이라며 하얀 봉투를 건넸다.
" 꼭 참석할 줄 알고 왔어요. 그 사람에게 꼭 전해 주세요. 만약에 제가 드리는 선물이 죠바니에게 가지 않을 경우 그에 따르는 저주는 모두 당신에게 돌아갑니다.”
사랑의 배신. 슬픔과 증오 그리고 그녀가 선물이라며 건네준 하얀 봉투. 나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저히 알 도리가 없었지만 난 받을 수 없다고 거부할 용기도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심각했던 표정이 무서웠고 어떤 음산한 기운마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당 안에는 이미 수 백명의 화려한 이브닝드레스와 정장 차림의 축하객들로 가득 채워졌다. 눈처럼 하얀 턱시도 예복에 빨간 나비넥타이를 맨 신랑이 입장 하자 곧 이어서 죠바니의 사촌 동생에 이어 신랑에 처남이자 죽마고우이기도 한 마르셀로, 마지막으로 신랑의 학교 친구인 내가 입장할 차례가 되어 마치 내가 치르는 결혼식인 양 잔뜩 경직된 자세로 섰다.
잔잔히 흐르는 캐논 디 현악 앙상블에 맞춰 꽃을 들고 들어오는 신부 측의 브라이드 메이드 입장 순서마저 모두 마치자 성당의 조명들이 꺼지더니 제단 앞까지 이르는 통로 양편에 설치된 촛불 형상의 전구들이 일제히 발광하면서 뎅그랑 딩~ 동~ 댕그렁 딩~ 동~ 몇 개의 크고 작은 종들의 청아한 울림으로 신부의 입장을 선포하였다.
종들의 소리가 멈추자 흐르기 시작하는 캐논 디 현악앙상블 음률이 아름답게 흐르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 짓는 아빠의 손을 잡고 걸음 한 걸음 들어서는 어여쁜 신부. 중세기 공주를 연상케 하는 긴 자락의 웨딩드레스 차림의 우아한 자태는 황금빛 등불에 반사되면서 몽환적 분위기마저 자아냈다.
사제의 인도로서 조금은 지루한 카톨릭 혼배예식이 진행되는 가운데 왕자와 공주처럼 나란히 서있는 두 연인.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한쌍이었다.
예식을 마친 하객들이 연회장 대기실에서 주류와 음료수를 들며 기다리는 동안 나는 주머니 속에 있는 봉투가 몹시 궁금해졌다. 가볍고 얄팍한 걸 보면 보통 편지 같은데 직접 전하지 않고 왜 날더러 전해 달라고 했는지 도통 이해 할 수 없었다.
무엇이 들었을까? 편지 같기는 한데 도대체 무슨 내용이지?
불처럼 타오르는 호기심에 봉투를 들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끝내 뜯어볼 용기도, 새 출발 하는 신랑에게 전해줄 마음도 없던 나는 실외 쓰레기통에 넣고 말았다
죠바니가 결혼하고 얼마 후 나는 그곳을 아주 떠났지만 그의 결혼생활도 삶도 모두 순탄치 못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그의 결혼은 결국 일 년도 못 가서 실패했다. 수년 후 치러진 그의 재혼은 삼 년 남짓 유지했으나 유감스럽게도 또 한 번의 결별. 이후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온갖 재정난 속에서 자녀도 없이 외롭게 살고 있다면 그녀의 저주는 그럭저럭 실현 됐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도 봉투를 신랑에게 전해주지 않을 경우 저주가 나에게로 돌아갈 것이라던 그녀의 경고가 완전하게 빗나간 현실을 돌이켜 볼 때 베로니카 저주의 실현은 주술이 아닌 매사에 신중치 못 한 죠바니의 경솔함 때문 일 것.
사랑의 배신으로 슬픔과 분노가 뒤엉킨 눈빛을 발하던 베로니카.
자신의 사랑을 버리고 다른 여성과 결혼식 올리는 장소에 나타나 내게 건네주었던 그 봉투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
그때 버리지 말고 그녀가 원했던 대로 친구에게 전해주었더라면 과연 무슨 일들이 일어났을까?
기묘한 수수께끼와도 같았던 하얀봉투의 비밀. 그에 대한 궁금증은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