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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로운 경험

미지의 방문자

by Seresta 2023. 12. 2.

 

'그것’이 내가 자는 집에 처음 나타났을 때는 바람 불고 비가 몹시 쏟아지던 어느 해 겨울 늦은 밤, 동네에서 숲 방향으로 오 킬로미터쯤 떨어진 외딴곳에 있는 양계장 지키기 위해 내려가 자던 시기였다.

 

울창한 유칼립 나무들로부터  빙 둘러싸인 가축 단지 내에는  동마다 오천 마리의 산란용 닭들이 기거하는 4동의 계사가 나란히 서 있었고 비탈길 아래쪽으로 돼지우리와 부속 창고, 관리인 용으로 지어놓은 집도 농장 위아래로 두 채나 세워져 있었다.

 

내가 편한 잠자리를 두고 관리인 가족까지 지척에서 상주하고 있던 양계장 단지 집에 내려가 자는 표면적 이유는  귀가 어두워서 밖에서 굿을 한다 해도 모를 관리인 대신에 정체불명의 들짐승들로부터 죽임 당하는 닭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은 나 혼자만에 공간에서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누려보고자 스스로 내린 결정으로  처음 며칠은 잠 만 자고 오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런데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꽤 오래전부터 한 번 닭장에 침투해 오면 최소한 이 삼십 마리의 닭 모가지를 따고 피만 빨아먹고 사라지던  정체불명의 맹수를 그곳에서 자기 시작한 지 일주일도 체 못 되던 내가 몽둥이로 때려잡았으니 우리 부모님의 놀람은 대단하셨다. 이년 이상 동안 막대한 피해를 입혀왔다는 정체불명의 맹수가 야무진 데가 별로 없는 아들에게 단숨에 잡혔으니 말이다.

 

은색의 달빛이 고고한 밤. 남의 소중한 닭들의 피를 잔뜩 빨아 마시고 계사 한구석에서 곤히 잠들어 버린 큰 덩치의 살쾡이. 밤의 적막을 깨는 닭 비명소리에 뛰쳐나온 성난 인간 눈에 뜨인 것은 녀석의 불행이었지만 나에게는 일거에  담력 좋은 아들, 그래서 우리 집 귀한 가축들을 지켜주는 수호자로 변신되게 해 준 은인, 아니 은짐승이나 다름없을 고마운 녀석이었다.

 

 

그렇게 밤만 되면 그 집으로 들어가 잠만 자는 생활이 단조롭고 실증 날 만도 하련만  담배를 마구 피워도, 차 몰고 인근 도시에 나가 밤늦도록 놀다 와도 속박받지 않는 자유로움이 너무 좋아서 매일같이 날 저물기만  바라던 유월의 마지막 밤에는 바람이 몹시 불었다. 

 

날씨도 우중충하고 분위기마저 음산하여 일찌감치 자리에 누어 잠을 청하고 얼마쯤 지났을까? 요란한 천둥번개에 놀라  창밖을 바라보니 굵은 비가 내리 붇고 있었다. 번개 빛이 번쩍일 때마다  창밖에 나무들은 마치 온몸을 흔들며 통곡하는 인간의 모습을 연출하여 나로 하여금 담요를 뒤집어쓰게 만들었다.

 

 

이윽고 그 요란스럽던 천둥번개는  지나고 비만 주룩주룩 내리는데 갑자기 집 천장에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뚜벅- 뚜벅. 분명 누군가가 힘차게 걷는 소리나 들려오자 나의 머리털과 온몸의 솜털들이 부르르 일어섰다. "거기 누구야?" 소릴 질러봐도 묵묵히 걷기만 하는 정체불명의 발자국 소리.

 

책상 위에 올라 떨리는 손으로 움켜잡은 기다란 칼 끝으로 천장 뚜껑을 여는 순간 발자국 소리도 뚝 멈췄다. 뭔지는 모르나 아무튼 덤비면 인정사정없이 마구 찌르리라!  단단히 각오를 한 내가 손전등으로 천정 구석구석을 비춰봐도 보이는 물체는 없었다. 뿌연 먼지만 잔뜩 깔려있는 천장 바닥. 오직 못 자국 틈 사이로 실내 불빛만 가는 서치라이트처럼 올라오는 천장 바닥에 아무런 흔적이 없다면 방금 들려왔던 소리는 도대체 누가?

 

누가 걸었다면 적어도 발자국도 몇 개는 남아있어야 정상인데 그것도 없고, 설령 누가 흔적을 남기지 않고 걸었다 치더라도 천장 자체가 인간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는 얄팍한 합판으로 깔려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결국 인간은 아니라는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밤은 한시가 훌쩍 넘어가고 잠잠하던 빗줄기도 다시 거세어 갈 때 또다시 들려오는 아까 그 소리.  극도로 예민해진 나의 신경을 자극하는 무서운 소리 뚜벅! 뚜벅! 쫘악 짝~! 건넌방 위쪽에서 내가 있는 방으로 천장에서 걸어오다 좌향좌. 쫘악! 건너 방 쪽으로 다시 저벅저벅 걸어가다 우향우! 짜악-. 

 

이쯤만 돼도 엄청 무서운데 그 소리가 바로 내 머리 위를 지나갈 때마다 뚝 멈추고는 잠시 조용~그러다 다시 걷기를 무려 십 여 차례나 계속했으니 그런 와중에서도 절대로 혼절되지 않는 내 체질이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 둘의 만남은 일주일에 세 번 꼴로 반복되었고 한 며칠 동안은 잠잠하다가 다시 또 나타나서 성화 대기를 무려 반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내가 그렇게 험한 꼴을 당하면서도 누구에게 말 안 하고 그 집을 못 떠났던 이유는 정체불명의 발자국 이야기를 주위 친구들에게 해 봐야 믿지 않을 것이고, 내 멋대로 삶의 끝을 의미하는 집에서 자라고 하실 부모님에게는 더더욱 말씀드릴 수 없었다.

 

아무리 생생하게 들렸지만 나 혼자만이 들은 소리였기에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소리인지 확인해야 했다. 환청 일 수도 있었고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내 정신상태의 정상 여부도 알아볼 필요가 있었기에  친한 친구 두 명을  나의 숙소로 불러들였다. 우리는 잔뜩 긴장하여 마치 정다운 애인의 방문을 기다리듯 발자국 소리를 기다렸지만 도무지 기척이 없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처음부터 의심쩍은 눈길을 숨기지 않던 두 친구는 음산한 환경에서 잠을 자다 끝내 신경쇠약에 걸린 것 같다며  병원 가기를 권유했을 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 자신마저 스스로의 정신 상태에 대한 의구심이 일기 시작했으니까. 졸지에 거짓말쟁이, 정신이상자가 된 나를 두고 두 친구가 막 돌아가려던 순간,  아- 내가 그렇게도 학수고대하던 그 소리. 스르르 쩍쩍~

 

오늘은 슬리퍼를 신고 왔는지 신발 끄는 소리로 시작하더니 다시 저벅저벅 쿵쿵, 찌그덕 찌그덕 쿵쿵. 신나게 활보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던 인간들에게 응징이라도 하려는 듯 보통 때 보다 더 난리 쳐대는 바람에 내 정신상태를 의심하던 녀석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지만 나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옳지! 그렇게. 더 세게 더 크게 다녀야 해!

 

넋을 잃고 있다가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온 녀석들. 날 정신병자 취급하던  두 친구가 천장 쪽문을 열어 후레시로 여기저기 비춰보았지만 그래  본 들 뭐가 보여야지. 텅 빈 공간만 확인한 두 친구는 무슨 내기에 이긴 사람 모양 득의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결국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처음에는 그렇게 무섭던 걸음소리도 나중에는 적응이 되어버렸으니 사람의 습관이라는 것. 정말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천장에서  별 소음이 들려와도 나는 나대로 책을 보거나 심지어  기타 치며 노래까지 불러댔으니 말이다. 오히려 한동안 잠잠할 때면 무슨 일이 생겼나 궁금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발자국 소리에 놀라 도망쳤던 두 녀석. 내가 유령 집에서 산다고  떠벌리는 바람에 꽤 오랫동안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겁 없는 놈, 괴상한 인간, 도 닦는 인간이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 해 여름, 나는 드디어 그것과 작별을 고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그날 밤에도 비가 내렸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 닭들도 몹시 포근한 듯 간헐적인 골골 소리를 내고 있을 뿐 아주 고요한 밤..

 

한동안 잠잠하던 천장 친구가 요란한 행군을 시작했는데 이건 걷는 것이 아니라 뜀박질이었다. 아이들이 장난치듯 한쪽 발로 쿵쿵 뛰다가는 드르륵드르륵 뭘 끌고 다니는 소리에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공포심이 밀려와서  살쾡이 때려잡은 야구 방망이로 발자국 소리를 따라 천장을 올려 찍어대니 녀석도 약 오르는지 더욱 난리를 쳐댄다.

 

천장 중앙에서 틈새가 한 뼘도 안 되는 가장자리로 옮겨 다시 몇 바퀴 더 뛰고는 벽을 타고 내려오는지 발자국 소리가 천장에서 벽으로 옮겨가면서 오싹하게도 이제는 판자벽 위를(옆을) 뚜벅뚜벅 걷다가 문득, 평상시의 고요함으로 돌아왔다.

 

이윽고 한동안의 적막을 깨고 다시 돌아온 소리. 두뚜드득득.... 이번에는 발자국 소리에  나무토막이 끌려가는 듯한 소리도  함께 들려온다.

 

저쪽 벽에서 내 방 벽 쪽으로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그것. 방금 전에 벽을 지나 바깥문을 밟고 왔으니까 이제 곧 커튼이라고 얇은 천으로 대충 가려놓은 이 유리창에 도달하지 않을까?

 

(나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야구방망이를 머리 꼭대기까지 추켜올린 체 창문을 노려보고 있자니 이윽고 정체를 드러내는 발자국의 주인, 핏기 하나 없는 얼굴에 긴 머리와 새빨간 눈을 가진 요망한 인간 형상을 한 요괴 한 마리가 긴 쇠꼬챙이로 나의 두 눈을 막 찌르려고 하던 그 순간. 나는 요괴 대가리를 향해 있는 힘을 다 하여 힘껏 내리 치자  푸르스름한 피가 사방으로…..)는 오직 괴기영화나 소설 속에서만 가능할 법 한 이야기. 

 

극심한 공포에 젖어 침대 곁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다가  그것이 창문 바로 앞에서 멈췄다고 느낀 순간 다시 돌아온 고요한 적막. 도대체 어떻게 생긴 놈일까? 지금 요기  앞에 와있으니  눈만 뜨고 보면 되는데 도저히 바라볼 용기는 나지 않고 진땀만 내리 흘러내렸다. 그리고 갑자기 그것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탓! 탓! 탓! 탓!….

 

마치 단거리 선수가 육상 트랙을 질주하듯 바깥벽을 돌고 있는 요망한 것. 나는 벽을 따라 돌고 있는 발자국 소리가 갑자기 아득하게 들려오는 것을 느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누가 창문을 요란스럽게 두드렸다. 그렇게 내리던 비는 언제부터 그쳤는지 눈부신 햇살이 창문을 통해 내 침대까지 펼쳐졌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관리인 영감이 내가 시간이 넘도록 일어날 기색이 없어 깨웠다는 것.

 

밖에 나가 봤더니 밤새 난리 쳤던 집 외벽에도 비에 젖은 바닥에도 누가 다녔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그날 이후 발자국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이듬해 봄 나의 삶을 찾아 부모님 곁을 떠날 때 까지도.

 

오랫동안 비바람만 불어대면 공연히 천장을 바라보던 습관도 세월이 지나가며 없어졌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때 내가 신경과민이 되어 환청을 들었던 것일까? 그때 나 말고도 두 명의 증인도 들었던 만큼 뭔가 걸어 다닌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그것이 짐승이었는지 인간이었는지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그때 보다가 기절하는 한이 있어도 기필코 봐야 했었는데 극심한 두려움에 보기를 포기하고도 혼절한 것이 많이 아쉽다 하지만 지금 와서 후회해 본들  다 부질없는 일.  지금까지도 비 내리는 밤이면  불현듯 생각나는 그 밤의 아우성이 이제는  망각 속으로  영원토록 사라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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