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는 불행의 원인은 술,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와인이 문제였다.
나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던 그 순간부터 몸은 없어지고 혼만 남아있는 유령으로 변했다. 그리고 일단 죽었으면 밝고 상쾌한 천국, 혹은 어둡고 뜨거운 지옥으로 가있어야 할 내가 무슨 연유로 한 장소에 갇혀 옴싹 달싹도 할 수 없는 불쌍한 신세가 되었을까?
나를 지금의 요 모양 요 꼴로 만들게 한 것은 10년 전 연말 모임에서 마구 마셨던 붉은 와인이 직접적인 요인이지만 그런 음주 상태에서 운전대를 잡게 만든 것은 친구들의 자랑질이었다
회식 분위기의 시작은 좋았다. 오랜만에 보는 동창들도 반가웠고 식탁 위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도 백, 적 두 종류로 넉넉하게 준비된 와인의 품질도 기대 이상이었다. 부지런히 먹고 마시는 와중에도 우리들의 정담은 그칠 틈도 없이 이어져 갔다.

처음에는 가족들의 이야기 은사들의 근황, 이민 간 친구들의 이야기, 이미 세상 떠난 친구, 투병 생활하는 친구 이야기로 시작되던 우리들의 이야기는 대화가 무르익어 감에 따라 정치 시사 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자칫 열띤 논쟁으로 잔치 분위기를 해칠까 염려되어 잽싸게 삶의 스토리로 화두를 돌린 모임 회장의 지혜로 회중의 대화 거리는 다시 우리가 사는 이야기로 돌아갔다.
누구에게 뒤질세라 미처 못 끝낸 상대방의 말까지 끊고 늘어 넣는 자신들의 인생 성공담이 빠르게 전개되는 속도에 따라 내 와인잔 비어지는 속도도 높아만 갔다.
주식을 좀 했는데 대박을 맞아 세상 살 맛 난다는 녀석, 강철 같이 다져진 몸매를 내보이면서 너네들 왜 그렇게 허약해 보이냐고 자랑하는 친구. 범상치 않은 미모를 가진 마누라 탓에 스트레스를 받는 다던 나쁜 자식은 내게 대놓고 전형적 주부 스타일 마누라와 사는 네가 부럽다고 까지 말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참았다. 학창 시절 아주 쫀쫀하고 치사한 자라고 소문났던 또 다른 녀석이 놀기 좋아하는 아들 녀석 때문에 엄청 속상했었는데 기대하지도 못했던 일류대학에 떡 합격해서 이제는 속 이 다 풀렸다며 활짝 웃는 모습을 보는 나의 마음은 찢겨 나가는 듯했다.
반평생 주식이라는 주 자도 모르고 살다가 하도 주위에서 돈 번다고 난리 치는 바람에 큰맘 먹고 몇 군데 투자했다가 일 년만의 육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날려버린 나. 반평생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 하느라 몸 성한데 없다고 투정하는 내 마누라에 대한 친구 놈의 평가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당뇨와 고혈압으로 삶의 질이 현저하게 낮아진 나의 분노 조절을 잃게 만든 것은 아ㅡ 불쌍한 나의 큰 녀석. 그놈 잘되라고 가산이 휘어질 만큼 돈을 쓰며 학원이다 족집게 과외다 할 수 있는 건 다 시킨 보람도 없이 재수도 아닌 삼수 도전에 실패하여 제 방에 틀여 박혀 두문불출 중에 있는 아들의 초라한 모습이 떠올려졌기 때문이다
나는 끝나지 않은 회식자리를 박차고 나와 차에 올랐다.
황급히 따라 나온 몇몇 친구가 그렇기 취한 상태에서 어딜 가나고 한사코 만류하며 내 허리를 부둥켜안고 끌어내리려고 난리 쳤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나를 제지할 수는 없었다.
많이 취한 탓으로 두 발 걸음마는 비틀댔어도 내가 모는 자동차는 넘어질 염려가 없는 네 바퀴 달린 기계. 자동차는 위풍당당하게 구르기 시작했다. 창문을 반쯤 열자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게 술도 좀 깨는 느낌에 CD 음반을 작동시켰다.

며칠 지난 크리스마스 캐럴을 듣노라니 조금 전의 속상함은 어느새 사라지면서 경쾌한 징글벨 리듬에 따른 취중 운전의 흥겨움도 높아만 갔다.
한두 잔 마시고 운전하는 여느 음주 운전과는 차원이 다른 만취상태에서의 운전. 타이어 구르는 느낌은 구름위로 둥실 떠가는 마술양탄자처럼 환상적이었다. 아스팔트 도로를 둥둥 떠 달려가는 나는 친구들 자랑질에 좌절한 못난이가 아닌 세상 무서운 것 없는 도로의 무법자로 변신하여 세상 모든 물체가 만만히 보이는데 감히 신호등 불빛 따위가..
저만치 신호등 파란빛이 빨강 빛으로 바뀌는 걸 똑똑히 봤지만 기분 좋게 잘 달려가던 차, 오백 원 은전 만한 아주 작은 불빛에 멈출수는 없는 노릇이라 🎵종소리 울려라! 종소리 빵빵! 경적을 울리며 그 모습 그 속도로 내달려가던 바로 그 순간.
파란불의 신호등만 잔뜩 믿고 네거리를 통과하던 다른 자동차와 대충돌하면서 이 쪽은 이 몸 하나, 상대편은 네 사람 모두 다섯 영혼들이 각자의 육체에서 급속도로 이탈하는 끔찍한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사람들은 간 사람보다는 오히려 남은 가족들만 슬프고 안 됐다고 하는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제 수명을 다하고 가시는 분들, 질병과 사고로 인해 돌아가시는 분들, 남이 저지른 사고 탓으로 가시는 분들은 예비된 영원한 장소로 떠나지만 내 탓으로 타인의 생명까지 거두게 되면 일단 그 잘못의 대가부터 치러야 하는지 나는 사고 났던 그 네거리 앞 큰 고목나무에 갇힌 유령으로 변신되었다.
마치 깊은 뿌리가 달린 나무인 양 꼼짝달싹 못한 체 많은 행인들이 오고 가는 길목만 바라보며 수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육체가 없다 보니 추위도 더위도 , 배고픔이나 목마름도 못 느꼈지만 가족과 친구 그리고 세상에 관한 그리움은 살아있을 때 보다 오히려 더욱 강렬했다.
하루에도 수천 명씩 스쳐 가는 인파 사이에 어쩌다가 조금이라도 낯익은 얼굴을 불 때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일면식이라도 있는 사람을 찾아보는 것뿐이었고 그것이 그나마 나의 유일한 낙이었다.

지난날 나와 감정 있던 자, 내 돈 떼어먹고 사라졌던 자를 보았을 때는 그래도 아는 모습이라고 얼마나 반가왔던지. 세상에서 살 때는 그렇게 얄밉고 미웠던 인간의 얼굴을 보고 좋았는데 하물며 친했던 친구들을 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스쳐 지나갔던 수백만 사람들 증에 아는 사람들은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극소수였다. 그나마도 이곳저곳 잘 돌아다녀야 하는 보험 판매원 아니면 밀린 외상값 수금 다니는 직원들이었지 막상 보고팠던 내 가족이나 친구들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해 첫눈 내리던 겨울.
나는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우리 가족을 보고 눈물도 소리도 없는 대성통곡을 해야 했다.
저만치에 세 사람이 걸어오는데 바라본 첫 순간부터 심상치 않았다.
내 딸아이의 걸음걸이, 살짝 고개 숙이고 걷는 버릇이 있는 아내, 그리고 유난히 긴 다리가 금방 눈에 띄어지는 나의 아들. 점점 가깝게 다가오는 세 행인의 모습.
내 가족이야!라고 확인되던 그 순간. 이제는 많이 의젓해진 내 아들, 처녀티가 완연한 내 딸, 그리고 아직도 슬픈 기색이 가득한 초라한 아내가 바로 내 앞에서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가족들의 시선을 끌려고 했지만 그것은 오직 안타까운 나의 소망이었을 뿐 나뭇잎 한 개도 움직이지 못하는 나의 존재를 못 느낀 우리 가족은 그렇게 스쳐 지나갔고, 그날부터 나는 아무것도 보려 하지도 않고 느끼고 싶지도 않은 오직 무서운 그리움에 한이 맺힌 망부석 유령으로 변해버렸다.
돈 몇 천만 손해 본 것이 뭐가 그렇게도 속상했을까?
아들의 입시 실패가 인생의 전부는 아닌데 왜 그렇게도 힘이 들고 고통스러웠을까?
친구들의 자랑이 나에게 뭐라고 그렇듯 이성을 잃을 정도로 참을 수가 없었을까..
아 이 뼈저리게 후회가 되는 나의 운명. 제발, 지금 이 순간을 내가 사고 치던 십 년 전, 술에 만취되어 차에 오르기 바로 그 직전으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얼마나 좋을까. 현실이 아닌 이 악몽에서 깨어나 나의 그 자리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조금만 참고 조금만 지나고 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을 그 하찮은 것들이 나에게 파멸을 가져다줄 만큼 어마무사했던 존재들이었나? 내가 남으로 인하여 괴롭고 힘든 만큼 나 역시도 남에게 그런 괴로움을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비록 건강이 좋지 못해도 사랑하는 가족을 가지고 있다는 한 가지 만으로도 고마울진대 하물며 아내가 늙어간다고 아쉬울 것이 뭐가 있을까. 그래, 설령 자녀들이 말 잘 안 듣고 공부를 못해 석 좀 썩여준다고 치자. 그래도 사회나 주위사람들에게 해 끼치니 않고 올바르게 살아간다면 그 자체 만으로도 고마운 일 아닌가. 지금은 소원한 관계가 되어 싫어졌더라도 지난날의 나를 알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친구가 그래도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
모임이 많아지는 연말에 음주 운전 행위는 평생을 두고 후회할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가족과 친구에 대한 한 맺힌 그리움으로 저승도 못 가는 유령으로 변 할지도 모르기에 매사에 조심 또 조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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