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친구의 결혼식이 있는 토요일이라서 돼지우리 청소까지 끝내고 나가려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돼지우리는 며칠만 닦지 않아도 바닥 전체가 오물로 범벅되기에 반드시 수압 높은 호수 물줄기로 씻어내야 하는 법. 돼지들이 질척대는 우리 바닥을 씻어내기가 무섭게 깨끗해진 쪽으로 옮겨가면서 자기 몸에다 물로 씻겨달라며 눕거나 엎드리는 행동들을 나는 이해 할 수 있다.
돼지들의 습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 음식이라고 꿀꿀대며 마구 삼키고 더러운 장소 구정물 속에서 뒹굴기 좋아하는 동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단정하지 못한 생김새 탓으로 잘 못 알려진 선입관. 사육사들이 비좁은 우리 속에 가두어 놓은 체 사육하다 보니 더럽고 지저분한 동물로 알려졌는데 돼지의 실체는 누군가 자기 몸 긁어주기를 좋아하고 청결한 장소 깨끗한 음식 먹기를 선호하는 고상한 동물. 그래서인지 근래에 들어와 반려 돈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우리 바닥만 씻는 일 외, 오늘만큼은 여느 때와 같이 자기 등 긁어달라고 엎어지는 돼지들을 한 놈씩 긁어 줄 시간이 없어 시원한 물줄기와 솔 마사지를 기대하며 자빠져 있는 녀석들에게 물 한 번씩 뿌려주는 것으로 생략하며 바로 외출 준비로 들어가 찬물로 샤워하고 머리 말리고 내가 아끼는 감색 슈트 하늘색 셔츠, 넥타이까지 매고 나면 외출 준비 끝.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세차를 마친 자동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시야에 펼쳐지는 아스팔트 도로를 스쳐가는 가로수 잎들이 유난히도 싱싱해 보이고 초원의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의 모습도 평화롭기 그지없다. 목적지를 향해 쾌적하게 달려가던 자동차는 서둘러 나온 탓인지 너무 일찍 도착할 것 같아 일단 도로에서 벗어난 공원 나무 그늘에다 차를 세웠다.
겉옷 벗은 셔츠차림이라 해도 오월달 중반 오후의 따가운 햇볕을 피하려 나무그늘 벤치로 향해 걸어가는데도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고 더디게 느껴진다. 구비 구비 이어지는 아스팔트 바닥은 아지랑이 호수로 둔갑되어 반짝대고 어디에선가 때 늦은 수탉 우는 소리가 피곤한 나를 더욱 나른하게 해 주었다.
땅바닥에서 사이좋게 모이를 찾던 참새 두 마리가 갑자기 뭐가 틀렸는지 갈기까지 세우며 한바탕 싸울 준비에 들어가고, 길 맞은편에서 오던 한 중년 여인과 소녀가 새들 노는 모습 보려고 허리까지 굽힌 내 모습에 활짝 웃으며 지나쳤다
예식 장소는 청춘남녀들의 잔치였다. 자신들이 가장 아끼는 옷을 입고 왔을 한 무리의 처녀들이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만드느라 여념 없었고, 평소의 가벼운 언행과 체신머리 없는 웃음을 일체 삼가며 가급적 점잖은 너털웃음과 무게 있는 언행을 쓰고 있던 친구 녀석들은 겨우 일주일 만에 보는 나를 마치 십 년 만에 재회하는 사람들 인양 과장된 인사말을 보내주었다.
모두가 기다리던 결혼식이 시작되자 남극 산 펭귄을 연상케 하는 신랑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섰고, 웨딩마치에 맞추어 부친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신부의 자태는 마치 호숫물에 떠있는 백조처럼 우아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머리터럭이 파뿌리가 되도록..."
수많은 신랑 신부들에게 꼭 같은 주례사를 했을 주례자의 순서가 끝나고 반지교환에 이어 신랑 신부의 입맞춤 그리고 멘델스존의 경쾌한 행진곡에 맞춘 신랑 신부의 퇴장으로 결혼식은 끝났다.
피로 연석은 두 군데로 나누어져 나이 들은 하객들은 실내 안에다가, 신랑과 신부의 친구들은 실외 정원에 준비해 놓아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젊은이들의 만남 장소처럼 꾸며놓았다
연회가 시작되면서 거북이 등판같이 반듯하던 청년들의 자세는 고양이 등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돌아갔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사회자 제안에 따른 각자가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이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 중앙까지 걸어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거주지, 직업, 그리고 취미까지 말한다는 것은 좀 떨리는 일이었지만 모두 들 성심 것 그리고 정성을 다해 자신을 소개하느라 열심이었고 부하가 상관에게 고하는 듯 씩씩하게 말하는 청년, 초등학교 학생이 선생님에게 숙제 제출하듯 아주 조그만 음성으로 자신의 내력을 말하는 처녀까지 모두 달랐다.
내 곁에 있던 친구가 차례가 되어 나갔다 들어오고 맞은편에 앉아있던 안경 쓴 처녀가 돌아온 다음 나는 그날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끼는 몸을 일으켜서 앞으로 나가는데 내가 결혼식장에 도착해서부터 날 힐긋 훔쳐보던 몇몇 처녀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 지금은 비록 부모님을 도와서 닭과 돼지를 치고 있지만 언젠가는 나의 길을 찾아갈 예정에 있습..........”
나의 이력을 간단히 고할 수 있었으나 끝맺음은 할 수 없었다. 자리에 앉아있던 한 무리의 처녀들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자리를 떴기 때문인데 나는 그런 광경에 멍하고 있다가 신발이 그게 뭐냐는 친구의 외침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집 떠나기 전에 분명히 목욕했고 양복과 넥타이도 정성껏 잘 매었다.
돼지 냄새 오물 악취를 없애려 솔향기 향수까지 듬뿍 뿌렸을 만큼 나름대로 나갈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도 구두를 그만 깜빡한 것이다.
전 날밤 열심히 광내었던 나의 구두,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신발장에 고이 모셔놓은 그 구두 대신에 돼지우리 청소할 때 신었던 고무장화를 신고 나갔을까?
덤벙끼가 다분히 있는 나는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친구 녀석들까지 못 봤을까?
그나마 왼쪽 장화는 바지 단으로 덮여있어서 발 교정을 위한 특수 구두처럼 보였지만 오른편에는 바지단이 장화와 다리에 끼어있어 돼지똥 잔뜩 묻은 고무장화의 투박하고도 지저분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차라리 끝까지 몰랐더라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나 편했을 것 을, 고무장화 신고 나온 사실을 알고 나서는 도저히 그 자리에 앉아 있을 기분이 아니라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느꼈던 참담한 심정이란.
그날 이후부터 외출 시 구두를 확인하고 살피는 버릇이 생긴 내 꼴을 보고 숨 넘어 가게 웃던 처녀들 중에는 훗날 우리 애들의 엄마가 된 아가씨도 끼어 있었으니 이런 경우를 두고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그때 당신의 고무장화 차림은 꽤 매력적이었다는 거짓말쟁이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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