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짐승이 뭐냐고 질문한다면 금방 답이 나올 것입니다. 이빨 예리하고 힘세고 사나운 육식 동물들. 호랑이 아니면 사자 같은 맹수들의 모습이 금방 떠오르기 때문이죠.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징그러운 것들을 꼽아보라면 바로 답할 수 없을 것이 우리 주변에는 정말 몸서리 처지도록 징그럽게 생긴 것들이 너무 많은 까닭입니다.
어떤 이들은 바퀴벌레 지네, 혹은 송충이나 민달팽이 같이 배를 깔고 기어 다니는 벌레들에 진저리 치는가 하면 굼벵이와 구더기가 오물오물 움직이는 모습에 차마 눈 뜨고 바라보지 못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데 저라고 다를 리 없어 어릴 때 자주 잡아서 놀던 나비잠자리 반딧불 같이 예쁜 곤충들은 괜찮은데 귀뚜라미만큼은 무슨 ’ 포비아’ 현상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엄청 협오스럽다 보니 그 벌레들이 창궐하는 가을이 다가올 때마다 어쩔 수 없는 극한의 긴장감이.....
-해마다 가을이 올 때면-
내가 아주 여려서 이불 포대기에 싸여 지내던 시절, 많은 식구들로 북적대던 우리 집에 또 한 명의 가족이 늘게 되었다. 어머니께서 나와 세 살 터울의 남동생을 낳으신 것인데 아직은 아기 취급받아야 할 중간 크기 아기가 버젓이 자라고 있는데도 새로운 아기가 태어나 나는 엄마 품속에서 큰 누님 잔등으로 밀려가야 했다.
모범 여고생 누나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부터 이미 자신의 분신이 된 어린 동생을 돌봐줘야 했단다. 내 기억 속에는 이미 모두 지워졌지만 누나가 책상 앞에서 공부할 때도, 동무들이 찾아와서 밖에 나갈 때도 누나 등에 계속 업혀 있었다니 아무리 참을성 많았어도 짜증 났을게 뻔한데 게다가 어린 동생은 걸핏하면 빽빽 울어대는 울보. 한번 울기 시작하면 스스로 그칠 때까지 어떻게 해볼 방도가 없어 무척이나 힘들었는데 우는 아기 뚝 그치게 하는 방법을 찾은 후부터 아주 편했다고.
“아가 저기 저 귀뚜라미 소리 들리니? 저것이 몸집 은 작아도 아주 무서운 귀뚜라민데 어디서 이이 우는 소리만 들리면 깡충깡충 튀어와 막 깨물어댄대요. 악~~~! 무섭다 귀뚜라미 무서운 저 소리 들어보렴 찌륵! 찌륵 귀뚜라미 워비~"
그러면 겁에 질린 어린 동생은 울던 울음만 뚝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나 잔등에다 얼굴 푹 묻으며 오들오들 떨어댔다니 아무리 말 못 하는 어린애라 해도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동생이 가냘픈 몸을 떨면서 그 작은 얼굴로 제 잔등을 간지럽히는 느낌이 좋아 걸핏하면 울지도 않는데도 귀뚜라미를 불러댔고 그것도 부족해서 집에 놀러 온 제 친구 등에다 업혀놓고 귀뚜라미를 호출했다니 아기는 얼마나 황당하고 놀랐을까?
"요 녀석이 귀뚜라미를 그렇게 무서워하던 그 동생이니?"
어렸을 때도 이런 질문을 누님 친구들에게 자주 들었을 만큼 나는 귀뚜라미 무서워하기로 유명한 애였으나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던 아기 시절의 이야기. 세상 무서움 모르는 유년기에 들어서면서 귀뚜라미 공포증은 사라졌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어느 해 가을. 우리 가족은 살던 집을 처분하고 앞마당에 펌프 달린 우물이 있고 연탄창고로 쓰는 작은 광이 따로 붙은 집으로 이사 갔다.
아직도 많이 낯선 집으로 들어갔던 그날 저녁, 나는 엄마의 심부름으로 창고에 들어가 연탄 한 개를 집게로 집고 나오다가 티익! 찌익! 어떤 감촉이 얄팍한 고무신발 바닥으로부터 전달되는 느낌에 천장에 달려있던 형광등 줄을 당겼다. 깜빡.. 깜빡... 깜박 파악 팍!
마침내 밝혀진 형광등빛은 천장과 벽 그리고 바닥에까지 다닥다닥 붙어있던 수천 마리 귀뚜라미 형상을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었고 나는 바닥에 진 치고 있던 허옇고 통통한 배때기가 말갛게 비쳐 보이는 귀뚜라미 몇 마리를 짓밟고 있었다. 아ㅡ 징그럽기 짝이 없는 귀뚜라미 소굴이 다른 장소도 아닌 바로 우리 집안에 있었다니….
그날 이후 나는 다른 심부름은 곧 잘해도 연탄광만큼은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광에서 울려 퍼지는 귀뚜라미 교향곡은 밤 깊도록 나를 괴롭혔다. 귀뚤 귀뚤 또또-르르르... 찌륵 찌륵 찌찌르르르륵.....
가을이 오고 가기를 얼마나 많이 반복되었던가. 우리 가족이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처음 맞이 했던 그 해, 사계절이 불투명한 엘에이에도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와서 밤공기가 제법 쌀쌀하게 느껴지던 저녁, 나는 뒷마당 밤하늘에 둥실 떠오른 달을 보다가 거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찌르르르, 귀뚤, 귀뚤 또르르르......반 투명한 갈색 몸체를 가진 미제 귀뚜라미는 검은색 고국 귀뚜라미보다 몸집도 커 보였고 날개비빔 소음도 더 시끄럽게 들렸지만 난 이제 예전의 겁 많은 아이가 아닌 용감한 성인. 한낱 귀뚜라미 따위에 겁먹던 시절은 오래전에 지나갔는데도 초등학생이었던 막내아들이 냉큼 집어 밖에다 버리고 들어올 때까지 나의 긴장은 풀리지 않던 기억이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무덥던 여름날도 다 지나가는 제법 쌀쌀해진 오늘 밤. 나는 올해 들어와 첫 번째 귀뚜라미 소리를 듣고 있다. 무척 오랜 세월 동안 귀뚤이 소음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이제는 많아 나아져서 그렇게 무섭거나 징그럽지는 않아서 그냥 그러려니 한다.
간혹 낯짝 두터운 귀뚜라미 한 마리가 꼼짝하지 않은 채 마냥 죽치고 있을 경우 정말 어쩔 수 없이 식구들로 하여금 내쫓게는 해도…
'삶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래도 아름다운 세상 (1) | 2023.11.12 |
---|---|
수은 가로등 (1) | 2023.11.11 |
달 밝은 가을 밤에 (0) | 2023.11.06 |
제니퍼의 꽃다발 (1) | 2023.11.01 |
첫 경험의 환희. 그리고 두려움 (1) | 2023.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