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하루 남기고 늘 조용하기만 하던 마을은 갑자기 들뜬 분위기로 변하였다. 올해 추석은 마을을 방문하는 높으신 나리 일행들을 맞는 행사와 겹쳐져 개인이 아닌 마을 전체의 잔치로 치러야 했기에 동네 아줌마들은 다음날 쓰일 송편 빚기와 여러 가지 음식 준비하시느라, 아저씨들도 닭 돼지 도살하시고 삶아내기에 분주하셨다.
갓 쪄내 온 순대와 돼지 수육, 닭고기, 생선 전과 파전. 고사리 녹두 부침에 송편과 시루떡 그리고 여러가지 과일들 모두 마을 학교 교실내 몇장의 기다란 송판으로 급조된 식탁위에다 잘 진열해 놓고 다시 여러집에서 착출해 온 몇장의 홀겹 이불로 감싸 덮어놓은 이유는 아직 전기 없는 마을에서는 냉장고를 쓸 도리가 없어 미리 조리해 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와 행동이 민첩하여 족제비라고 통하는 친구, 그리고 몸통은 뚱뚱한 편인데도 목 부분이 유난히 가늘다고 하여 사슴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로 형성된 우리 악동 삼총사는 매 주말마다 한 번은 우리 집 한번은 누구네 집에서 돌아가면서 합숙했는데 그 밤은 족제비집 뒷채 별관에서 자기로 돼있었다.
우리는 족제비가 제 아버지 방에서 훔쳐온 담배 한 가치를 나누어 피웠고 내가 집에서 들고 온 맥주 한병도 나누어 마신 후 마룻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저녁무렵 엄마의 심부름으로 학교에 갔다가 바라 보았던 풍성한 음식물들. 우리 같은 아이들에게 까지 돌아올 것 같지 않은 사과 바나나 포도같은 과일들이 생각났고 다시 송편과 기름도는 순대와 삼겹살 수육도 마치 실물을 대하듯 눈앞에 일렁이고 있었다.
- 우리가 이렇게 누워 침 만 삼키지 말고 학교로 쳐들어가는 게 어때?
참신한 내 의견에 동무들은 즉각 동의하여 우리는 학교에 침투하기로 의견을 모아 손전등 한개 손에 들고 학교로 향하는 신작로를 걸어갔다. 밤 아홉시 캄캄한 밤 하늘에 둥실 떠오른 보름달도 마치 우리의 위대한 장도를 축복하는 듯 발길을 밝혀주어 어렵지 않게 현장에 도착할 수있었다.
달빛에 비친 학교 건물은 마치 귀신들의 소굴처럼 매우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지만 이미 먹을 것에 이성 잃은 아이들 눈에는 아무런 두려움도 주지 못했고 모든 문들과 창문들이 굳게 닫혀있는 가운데 우리는 학교 주위를 몇 차례나 돌면서 빈틈 찾아 헤매다 살짝 열린 작은 창문 한 개를 발견했는데 화장실로 통하는 그 작은 창문은 모두 여섯 장의 유리로 되어있었고 활짝 열어젖힐경우 우리가 빠져 들어갈만한 공간은 확보 될 듯 싶었다.
이번 거사를 주동했던 ‘바두기’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나의 별명. 어떤 나쁜 놈이 얼굴 생김새가 딱 자기네 진돗개 상판 닮았다고 하여 붙여준 별명)가 첫 번째, 다음은 뚱뚱한 사슴, 그리고 가장 작은 몸매를 가진 족제비로 순서를 정한 다음 우리는 침투작업에 들어갔다.
내가 먼저 하반신을 창틈에 넣고 삐져나가려는데 배 부분이 걸려 못 나가고 있었을 때 사슴과 족제비가 세게 밀어 넣은 덕분으로 창 안으로 떨어질 수 있었고 나보다 더 큰 몸 때문에 상당히 어려울 것 같았던 사슴이 들어올때는 안에서 내가 끌고 밖에선 족제비가 밀어서 의외로 쉽게 빠져나왔고 날렵한 족제비는 제 스스로 들어왔으니 이제는 신나게 먹는 일만 남았다.
나는 그토록 사모하던 배 한 개와 송편 서너 개, 그리고 생선 전 두쪽과 돼지고기 서너 점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고 사슴 녀석은 뭘 그렇게 집어삼켰는지 그렇지 않아도 퉁퉁한 배가 오뚝이배처럼 불러있는데 한 손에는 순대를 다른 손에는 송편을 몇 개 움켜쥐고 있는 족제비 입 주변에는 기름이 잔뜩 묻어 번들거렸다.
잔뜩 먹어 더 이상 아쉬울 것 없는 우리는 들어왔던 순서에 따라 내가 먼저 탈출을 시도했는데 처음 들어올때와는 달리 아무리 두 동무가 내 몸을 마구 밀어도 창틀에 잔뜩 부른 배가 끼어 도저히 빠져 나갈수가 없었다.
내가 못 빠져나갔다면 이미 일본 다루마 인형으로 변신 된 사슴은 시도해 보나 마나, 오직 족제비만이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었겠지만 나와 사슴은 족제비의 탈출을 단호하게 불허했다. 우리는 먹을 때도 같이 먹었듯 죽을 때도 같이 죽어야 하는 동료였기에.
밤이 깊어 갈수록 교실 내 온도는 더욱 내려갔다. 그렇게 사모하던 음식도 몽땅 부질없게 느껴졌고 그저 이곳을 빨리 탈출하여 따스한 이불속으로 들어가고픈 마음만 간절했다. 달빛에 희미하게 밝혀진 텅 빈 실내는 굉장히 무서웠고 한번 무서움을 느끼게 되자 무언가 우리 곁에서 맴도는 느낌 때문에공포의 밤을 지세워야 하는 처지가 되고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세 악동. 그러나 한순간에 교실에 갖혀있는 죄수가 되었고 가상유령에 발발 떠는불행한 아이들로 돌변하여 사슴도 울고 족제비도 울었지만 애당초 음식 서리를 주동하여 사태를 이지경으로 만든 나는 울지도 못하고 목이 타오르는 갈증에 애궂은 물 만 마구 들이켰다
아무리 나가고 싶어도 들어왔던 창문으로는 나갈 방도가 전혀 없고 문이란 문들은 죄다 튼튼한 자물쇠로 잠겨있다면 우리는 천상 날 밝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한가위 밝은 해가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얼마후 몇몇 동네 아주머님들께서 만드시다 만 음식 준비를 위해 학교 문을 활짝 여셨을때 거지유령 같은 모습으로 문 앞에 바짝 서있는 세 아이를 보시고 거의 혼절하시는 사태가 일어났다
예쁜 얼굴로 동네아이들의 사모를 받는 영순이 엄마도 아주머니들 사이에 계셨는데 그 사건 이후 얻은 놀람병으로 인해 고생 많이하셨다는 소문도 돌았을 만큼 우리들의 꼬락서니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마을 어르신들로부터엄청 많은 책망을 받았고 그 여파는 우리들의 주말 합숙이 끝장나는 결과로 나타났다. 마을 전체가 한가위 대잔치로 떠들썩 했던 그 날 하루종일. 죄 많은 세 꼬마는 각자의 집안에서 반성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우리의 악동시대도 그 사건을 계기로 마감되었다.
'삶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은 가로등 (1) | 2023.11.11 |
---|---|
해마다 가을이 올 때면 (3) | 2023.11.06 |
제니퍼의 꽃다발 (1) | 2023.11.01 |
첫 경험의 환희. 그리고 두려움 (1) | 2023.10.30 |
한 여름날의 사랑 (1) | 2023.10.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