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의 겁(劫)이란 우주가 태동해서 멸망하기까지의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장구한 시간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일 겁의 시간은 물방울이 떨어져 집 한 채만 한 바위를 없애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하여 힌두교에서는 43억 2천만 년을 1겁이라고 표현한다니 아무리 실제와 동떨어진 추상적 숫자라 할지라도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타국 여행지에서 스쳐 지나쳤던 적지 않은 현지인들 및 관광객들. 내가 사는 동안 다시는 스치지 않을 그 사람들과의 순간적 만남을 불교에서는 43억 2천만 년 X 이천 겁(2000)=이라는 무궁무진한 시간을 소비해서 가까스로 성사된 인연이라고 가르친다.
1천 겁에 한 나라에 태어나고. 2천 겁에 하루 동안 길을 동행하며, 3천 겁에 하룻밤을 한 집에서 동거. 4천 겁에 한 민족으로 태어나고, 5천 겁에 한 동네에 태어나며, 6천 겁에 하룻밤을 동침.
7천 겁에 부부가 되고, 8천 겁에 부모와 자식이 되며, 9천 겁은 형제자매 사이. 그리고 1만 겁은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맺어지는데 필요한 시간은 영원에 가까운 세월.
특히나 스승과 제자 사이가 부부나 혈육 지간보다 더 위에 있는 최강의 인연이라는 논리는 무한의 세월 언급만큼이나 공허하지만 오늘날의 선생과 학생이 아닌 부처님과 불교 신자 사이로 이해한다면 희미하게나마 납득이 된다
아무튼 이처럼 1겁에서 1만 겁의 시간을 지나 이어진 인연은 일기일회(一期一回)라고 하여 평생의 단 한 번의 만남이자 내 생에 단 한 번뿐인 일이기에 옷깃만 스친 인연이라도 함부로 하지 말라는 불자의 가르침은 그나마 공감이 가는 부분, 처음 만난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그들의 인격과 삶은 당연히 존중해야 하는 까닭이다
이제껏 살아오며 잠깐 만나고 보았고 스쳐 지나쳤던 숱한 사람들.
길을 가다가. 또 기차와 버스 전철 같은 대중교통 차량 안 밖에서 이루어졌던 그 많은 짧은 인연들. 잠깐 만나고 눈 맞추고 옷깃을 스치며 지나쳤던 그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모두 기억한다는 것은 밤하늘에 별들을 헤아리는 작업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 되겠지만 간혹 어쩌다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평생을 두고 잊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내가 유치원 다니던 시절 우리 집 문밖에서 밥 얻으러 온 엄마 손에 이끌려 왔던 나만한 소녀의 슬픈 눈망울과 지금은 초등학교로 통용되는 국민학교 오 학년 때 인가 세 살 터울의 아우와 함께 학교로 가는 길에 만난 어떤 여인의 광기 어린 모습(그 시절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십여 년 전 기차로 중국 광저우에서 홍콩으로 가는 도중 신천역에 정차했을 때 비 내리는 창밖의 거리를 바라보던 중 우산 들고 서있던 중국 여성과의 우연한 눈 마주침을 수학적 확률로 계산한다면 이천 겁 숫자 못지않을 엄청난 숫자가 나올 것 같다.
짧은 삶을 살아가면서 만나고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중생들 중에서도 혈육으로 맺어지는 가족으로서. 오랜 우정으로 다져진 친구로서 그리고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다투기도 하며 잘 아는 이웃으로 맺어진 인연이란 각별하고도 각별할 것.
내 이름 석자를 불러주고 기억해 주는 모든 분들이 다시금 간절히 생각나는 고요한 밤중에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리운 이름들을 속으로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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