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중에는 나이에 비해 조숙한 사람도 있고 좀 더딘 사람이 있는데 나의 경우는 아무래도 후자에 속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나이 이십 초반부터 술이 뭔지를 알았으나 나는 불혹에 접어 들어서야 희미하게 깨우쳤기 때문이다.
무슨 모임이나 연회에서도 남들은 모두 술기운에 거나한데 나 혼자만 똘똘한 정신으로 콜라 잔 들고 잔 부딪치다 보니 술맛 떨구어대는 녀석, 다음부터는 부르면 안 되는 친구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애당초 술 안 받는 체질로 태어나서 소주 딱 한잔만 들이켜도 금방 속이 메스꺼워지다가 구토로 끝장내기가 일쑤였으니 도대체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언제까지나 본인 개인의 사정, 긴 세월 동안 주도에 통달한 친구들에게 외면당하고 왕따 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가 남들은 하도 마셔대어 비실비실 할 때쯤 , 비로소 맥주 한 병 정도는 거뜬히 마실 수 있게 되었으니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 아닐 수 없다.
고국에 갈 적마다 그렇지만 나는 한국이야 말로 사람 사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느 데를 가봐도 역동스럽지 않은 곳이 없고 도시 구석구석마다 삶의 향기들이 아주 진하게 배어있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 같은 곳은 한국 고유의 분위기가 없어 무척 생경하고 사방팔방에서 네온사인 빛 뿜는 밤거리에서도 무언가 황급히 들떠있는 기분만 느껴질 뿐 이기에 갈수록 사라져 가는 옛 서울의 풍경을 찾아 이 변두리 저 변두리로 나가서 정처 없이 걷게 된다.
맨 처음 고국 나들이가 바로 그랬다. 목요일 오후 북 방향 삼호선 전철 종점에서 내렸다. 그리고 날 어두워질 때까지 쏘다니다가 한 아담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많이 낡아 보이는 식당 안에는 삼십대로 보이는 남녀 한 쌍과 사십 중반 정도의 세 중년 남자들이 동행도 없이 들어오는 나를 한 번씩 바라 보고는 이내 본래의 자세로 되돌아갔고 중간 지점 식탁에 자리를 정한 나도 소주 한 병과 수육 한 접시를 주문한 다음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시간도 많겠다, 유유히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부부 사이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오누이 사이도 절대로 아닌 것 같은 한 식탁 건너의 커플.
무척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듯 간간히 양미간을 찌푸리기도 했고 때로는 언성을 높이기도 했는데 간간히 뚜렷하게 들려오는 내용들을 미루어 볼 때 아무래도 떳떳지 못한 사랑을 하다가 무슨 심각한 문제가 생긴 듯했고, 건너편 한구석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나 만한 나이의 세 사나이들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또 다른 친구를 비판하는 것 같았다.
캬~ 이 세상 그 어느 명 연극보다 더욱 리얼한 인생극장의 무대가 바로 이곳이었네.
그들의 대화는 은은히 들려오는 트로트 곡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외로운 나그네의 가슴을 뛰게 해 주었다.
여인: 뭘 어떡해요 날 이렇게 만든 당신이 책임져야지
남자: 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니까.
여인: 난 몰라요. 내일 오빠와 동생들에게도 다 말해야 할 듯싶어요.
남자: 잠깐만! 조급히 굴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니까 그러네. 나도 다 생각이 있어
중년 1: 사람을 봐가면서 돈 빌려 달하고 해야지 내 충고 안 듣더니 꼴좋다.
중년 3: 난 그 녀석도 그렇지만 돈 푼좀 생겼다면 금방 써버리는 네가 더 한심해.
중년 2: 나 까놓고 말하겠는데 그렇게 말하는 너는? 하는 일도 없이 일 나가는 마누라 덕에 사는 주제에
중년 3:이 ㅆㄲ가! 너 말 다했어?
중년 1: 자 자 그만 들 하고 우리 이차나 나가세
적당히 취한 사람들의 말싸움이란 스트레스 해소 및 정들게 하는 또 하나의 방법 인가.
식사를 마친 커플도 나가고 몇 잔의 반주로 발동 걸린 중년들마저 본격적인 술추렴을 위해 제2의 장소를 찾아 나가자 식당 안에는 오직 나 홀로 남아있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북서울 한 구석에 작은 식당하나.
- 아저씨 누굴 기다리시나 봐요.
-아닙니다.
-더 주문하실 거예요?
-그만 됐습니다.
아줌마는 조바심이 난 모양이다. 식사는 이미 끝낸 듯한데 돈 내고 나갈 기색은 보이지 않지, 저 혼자 피식피식 웃는 폼도 수상한데 누구를 기다리는 양 연신 두리번 대고 있으니.
-저기 아까 그 노래나 다시 한번 들려줘요.
-무슨 노래를?
-허공.
아줌마는 나오던 노래를 끄고 그날 그 밤에 아주 잘 어울렸던 가요를 올렸고 나는 그대 대한 작은 보답으로 매실주 한 병을 주문했다.
-이 동네 분은 아닌 것 같은데... 아저씨 어디 사세요?
-좀 먼 곳에 삽니다만.
-먼 곳이라면… 햇볕에 좀 그을린 모습을 보니 혹시 강원도 분 아니세요? 우리 친정이 바로 강원도 철원인데.
그녀는 나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자신의 동향 사람으로 단정 지었다. 의심이 가득 담겨있던 그녀의 눈길이반가운 눈길로 바뀌며 졸지에 동향인이 된 나를 앞에 두고 산 좋고 물 좋다는 고향집 이야기를 실컷 들려주고 나서 계산서를 들고 왔다.
마구 흔들리는 몸으로 행인들이 사라진 밤거리로 나서자 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까 내렸던 전철역이 어디쯤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고 간간히 질주해가는 차량들 가운데 택시는 보이지 않아 길 건너 저편에벤치로 향해 가는데 비에 젖은 나뭇잎에선지 풀에서 인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싱그러운 향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아- 고국에서만 느껴볼 수 있는 이 독특한 향기.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주량을 거의 두 배나 늘여준 것은 서울의 밤 향기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나그네의 외로움 때문이었나.
아니야.. 그건 아니지. 한국인으로 태어나 이토록 정겨운 고국 산천 등지고 사는 삶이 허공 같아서 그랬던 거야
1998. 6월